2024-04-19 14:18 (금)
무용가 김난현 경민대 교수
무용가 김난현 경민대 교수
  • 김은희기자
  • 승인 2019.01.07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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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억할 수 있는 춤꾼으로 남고 싶다”

 

김난현 교수의 전공은 한국무용이다. 무용만 40년 했다. 전통무용계와 창작무용계에서 ‘김난현’이라는 이름 석 자의 무게감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재능만큼이나 대학과 춤계에서 인정받은 춤꾼으로 또한 안무가로 정평이 나 있다.
전 세계 크고 작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또 학생들을 지도하며 춤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이기도 하다.

“추면 출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춤의 참 매력은 정·중·동이고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호흡으로부터 움직임이 생겨나고 그 호흡의 안배가 큰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춤은 추면 출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김 교수가 춤과 인연을 맺은 것은 기저귀를 떼고 걸음마를 시작할 때였다. 평상시에는 조용한 아이인데 음악만 틀어주면 얼굴이 밝아지며 흥에 돋아 춤을 추었다고. 음악도 춤도 무엇인지도 몰랐던 4살 때 음악만 나오면 몸을 흔들고 TV에 춤추는 모습이 보이면 따라 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무용에 끼가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출 정도였다. 이런 어린 딸의 재롱에 춤꾼으로서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들은 무용학원에 데려갔다. 워낙 춤추기를 좋아한 탓에 남들이 유치원에 갈 시기에 무용학원으로 보내진 셈이다.”
이렇게 춤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 김 교수는 고등학교(휘경여고)를 거쳐 대학(경희대 무용학과)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춤의 학습을 이어갔다. 그리고 끼와 열정을 한없이 발산했다. 그 결과 1988년 문화부장관상과 체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다. 2002년에는 무용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어린 나이인 35세에 제92호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로 태평무보존회 주최 제4회 ‘전국전통무용 경연대회’ 종합대상(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경연 최고의 영예로 치는 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처럼 그녀가 ‘우뚝’설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격함과 어머니 같은 사랑의 가르침을 하사한 스승들이 있었다. 고전적인 기법 속에 현대적 감각을 유입시킨 최승희를 계승하는 대표적 인물 김백봉 선생님, 그 맥을 잇는 김말애 선생님, 태평무의 강선영 선생님, 한영숙류의 춤을 잇는 김경희 선생님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훌륭한 스승과의 만남이 필요하겠지만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나에게는 여러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힘들게 배워 터득한 많은 스승들의 춤사위들이 나의 동작 하나하나에 조금씩 느낌으로 와 닿는다.”


태평무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1995년. 김 교수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태평무 전수조교인 이명자 선생님이 경희대 특강에 참석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전통무용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후 창작과 전통을 함께 공부하면서 강선영, 이명자, 양성옥 선생님 등 스승 밑에서 착실히 전통 춤에 대한 이해와 함께 기능을 쌓아갔다.
“당시 이명자 선생님의 그 현란한 발짓과 춤사위, 활달한 동작 등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그 길로 태평무전수관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전통무용을 하면서 창작을 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 실제 태평무의 그 춤사위 하나하나에는 많은 내적 사고가 있기 때문에 전통춤을 이용한 창작무용을 하다가보면 큰 도움이 된다.”
김 교수의 창작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생활 속에서 작품의 소재를 떠올렸다. 항상 주변의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영감을 얻으려 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바로 메모했다. 그녀의 창작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속적인 색채와 주제 아래 작품의 테마를 현대화해 전통을 재창조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김 교수가 ‘춤꾼’으로 ‘교수’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전통무용계와 창작무용계에서 무게감을 더하는 동안 그 뒤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 김성국 신촌연세세브란스이비인후과 원장과 아들이다. 특히 동갑내기인 김 원장은 너무나 이해심이 많고 열심히 도와주어 지금까지도 춤을 출 수 있었다고.
“(내가) 춤꾼으로 꾸준히 활동을 하는 데는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 큰 몫을 했는데 특히 남편은 마치 춤추는 사람처럼 도움을 준다. 대학시절부터 (나의) 춤을 보아왔는데 처음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아낌없는 격려와 위로를 보내주고 있다. 훌륭하신 스승과 이해심이 넓은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춤을 춘다는 그 자체를 굉장히 즐기고 좋아하는 김 교수는 ‘가족’이라는 배경을 등에 업고 태평무의 장단과 그 춤사위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해를 하면 언젠가는 선생님들처럼 깊이 있는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았고 때문에 계속 심혈을 기울였다. 무대 위에서 돋보이는 춤꾼이자 춤을 잘 추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춤을 춘다는 자체가 즐겁다”

김 교수에게는 가족과 무용 다음으로 마음을 준 것이 있다. 바로 ‘테니스’다. 남편을 따라 다니면서 고수들의 테니스 치는 모습을 보고 아이와 함께 코트에서 놀면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전국대회 출전 몇 번 만에 8강에 오른 그녀는 2012년 10월과 12월 준우승을 한 후 2013년 3월 개나리부 우승을 차지했다. 또 2014년 한국동호인 카토 국화부 랭킹 10위안에 들은 전적도 있다. 아들도 테니스 실력이 상당하다. 2018년 한국동호인 카타 스타부 랭킹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실력파다.
이처럼 일취월장한 실력은 ‘무용’으로 다져진 강한 멘탈 덕이다. 바라봐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날 정도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불의의 사고로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당했고 2년여의 공백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이 때 우울증이 찾아왔다. 반면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거의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최대한 집중을 한다. 라켓은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땀이 날 때까지 하고나서야 든다.
현재 그녀는 한국무용지도자협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춤의 창작 작업에 힘쓰고 있는 춤타래무용단의 부회장을 역임했다. 앞서 춤꾼으로서 정통코스인 경희대학교 무용학과와 경희대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조교로 남아 후배들을 지도했다.
또 대진대학교와 강릉대학교, 국악원 수업 출강 등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런가 하면 공연으로도 분주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무용제전을 공연하는가 하면 2017년에는 명인명무전을 공연하기도 했다. 
김난현 교수는 “나의 가치관이 전통과 접합된 진정한 춤을 언제 가는 만들어내고 싶다”면서 “좀 더 내면을 가꿔 깊이를 더해 짧은 순간에 모든 것을 평가받기보다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춤꾼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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