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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프리카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제는 아프리카를 이야기하고 싶다”
  • 김은희기자
  • 승인 2019.04.03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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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윤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말하는 이가 있다. 고선윤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특별한 존재’로 살았다는 고 교수는 자신만의 특별한 눈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 오랜 시간 내뱉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고 이제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리치>에서는 오랫동안 경계인의 삶을 살았던 ‘고선윤’의 인생스토리를 들었다.

 

고 교수가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은 8년이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를 잘하지 못하는 ‘조센의 여자아이’였다.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여기가 내 자리다”

‘사춘기 소녀’였던 그때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에는 남들과 다른 공간에서 기쁨과 외로움, 두려움을 머금고 쌓아온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다시 찾은 건 대학 진학을 위해 홀로 귀국했을 때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여기가 내 자리다’라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을 겪기 일쑤였다. 
“어릴 때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고 거창하게 설명했다. 지금은 ‘그러게 말이야…’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어쩌면 딸아이만은 이국땅이 아니라 내 나라에서 공부시키고 싶다는 엄마의 고집을 따랐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독립된 삶을 시작하고 싶은 20대의 사치스러움이 먼저였다고 고백한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재일교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중학교 미술선생님은 “역시 색감이 달라”라면서 칭찬인지 뭔지 모르는 말을 던졌다. 서울에서 이태원을 거닐 때는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당했다. 고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참 싫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뒤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남들과 다르지 않는 삶을 소유하고 싶어서 영주귀국해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일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은 고향인 경북 문경 선산에 묻혔지만 어머니는 아직 일본에 사신다.
경계인의 삶은 고 교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동양사학을 전공한 그녀가 대학원에서는 천 년 전 일본 헤이안시대의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일본에서도 살아보고 한국에서도 살아본 보통 사람의 눈으로 일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자이니치’도 ‘조센진’도 아닌 평범한 한국의 아줌마로서 남들과 달랐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특별한 눈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삶’ 자체를 녹아내 이야기하다

고 교수의 또 다른 직업은 작가이자 칼럼리스트다.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만 4권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낸 책 역시 4권이다. 이들 책 모두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책이지만 이들 책을 통해 오랜 시간 내뱉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다고 한다.
“벌거벗고, 심장을 드러내 보이는 부끄러움에 머뭇거렸다. 숨기고 숨겨두었다. 그래도 외톨이가 도망갈 곳은 종이냄새 듬뿍 담은 활자 속 밖에 없음을 아는 지라 용기를 내어 뛰어들었다. 글이 책이 된다는 것은 작고 작은 글쟁이에게는 생에 두 번은 있을까하는 큰 기쁨이고 영광이다.”
어릴 때 일본에서 공부를 한 덕에 번역 일을 오래 했는데 보행기에 아이를 태우고 한쪽 다리로 밀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일본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는 고 교수.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고선윤의 일본이야기’ 시리즈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도 비슷한 면이 있어서 한국과 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전혀 다른 나라다. 일본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수용하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년 전 고 교수는 일본에 관한 에세이 <토끼가 새라고?>를 세상 밖으로 내놨다. 이 안에 자신의 삶 자체를 그대로 녹아냈다. ‘반일론’이나 ‘친일론’이 다루지 않는 진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내용을 담았다. 직접 경험한 일상 속에서 일본 문화의 특징을 끄집어내고 이해와 소통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반일이나 친일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춰서 책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들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역사적 갈등 같은 내용은 일부러 쓰지 않으려 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너무 가깝게 느끼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깝기 때문에 타자로서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고 교수는 일본에서 살 때 겪었던 개인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만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특징을 담아냈다. 일본의 문화를 전할 때 그녀의 눈은 평범한 한국인의 시각에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한국의 기준에 따라 이해하려 하면 오해가 커지고 갈등이 심화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했다.
“한국에서 더 오래 살아서인지, 시스템을 중요시하고 개인을 억누르는 일본 사회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숨쉬기가 더 편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도 사회적인 강제와 통제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일본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숨겨둔 ‘자유의 열쇠’를 꺼내다

고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삶이 사회적 삶에 투영된 기록을, 서로 다른 두 나라 문화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이해받으려 하면 더 큰 오해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고 거창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미래보다는 내 자식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이기적 사람이다. 그런데 내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웃의 미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다.”
고 교수는 내 자식만 챙겨서 잘 살고 이웃이 배고픔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 자식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결국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서 같이 잘 사는 미래를 만드는 일은 내 자식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 교수는 3년 전 또 다른 도전을 했다. 스스로 꽁꽁 숨겨둔 ‘자유의 열쇠’를 꺼냈다. ‘국경없는교육가회(EWB, Educators Without Borders/대표 김기석)’라는 이름도 거창한 NGO의 멤버가 됐고, 아프리카를 누비고 다니고 있다. EWB는 교육을 통한 빈곤퇴치를 위해, 더 나아가 개발도상국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기관이다.
“내 새끼 키운다고 엄두도 못낸 일을 시작했다. NGO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덜렁 가입하고 나니 오십견으로 팔도 잘 올리지 못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두렵기만 했다.”
오지랖이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한 빈곤퇴치’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아프리카를 찾아다녔다. ‘내 새끼 챙긴다’고 귀도 눈도 닫고 살다가 막내를 대학에 보내고 나도 세상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쫓아다녔다고 한다.
“일이 어려운 것은 그 일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건 사람의 만남과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고로 그것이 어려움이다. 같이 잘 해보자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청년을 아프리카에 보내 일을 시켰더니 더 좋은 직장 구했다면서 떠나는 이가 없지 않나, 외롭고 힘들다면서 도망가는 이가 없지 않나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어려움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섭섭함도 많이 느꼈다. 뒤도 돌아보기 싫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튼실한 남학생들이 모두 떠난 자리 홀로 남아 프로젝트를 끝까지 수행하는 야무진 여학생이 있었고 살아있는 닭을 한 마리 쥐어주면서 감사를 표하는 아프리카 농부가 있었다. 이렇게 만남에는 항상 감사가 따랐다고.
 ‘글로벌 빈곤퇴치 운동’을 하며 보람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녀가 꼽는 대표적인 것은 작년 2월 10일에 있었던 일가관 착공이다. 이후 개시된 부지에 굴착이 시작됐고 하루에 500장씩 손으로 빚어낸 흙벽돌로 외벽을 쌓고 모래바람과 뜨거운 햇볕을 이겨낼 지붕이 연결되어 건물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고 교수는 일가관 공사 건립 이후 진행될 문해교육과 적정기술교육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한편 많은 현지 인력이 참여해 인근 지역경제의 활성화 및 고용창출을 이루는 성과도 기대하고 있다. 

케냐 돼지농장의 주인이 되다

“‘일자리 창출’, 지금 대한민국의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단어를 아프리카대륙에서 들으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회공헌이란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이며 그 도움이 받는 자만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도 성장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 꼭 경제적 이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이 만족하고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고 교수는 케냐 돼지농장의 주인이다. 아프리카에 방문했을 때 27년째 케냐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제임스박이라는 멋진 사람을 만난 게 계기가 됐다. 커피, 가죽 공예, 농장 등등의 사업지를 가지고 있는 그가 최근 악어 양식을 시작했는데 또 양돈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며 말한 추지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지금하고 있는 악어 양식은 사람의 손을 많이 필요치 않지만 양돈은 10마리 당 한사람의 손이 필요하며 돼지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고, 부양하는 가족까지 생각하면 언젠가 한동네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계산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야만 이 나라에서 사업을 하는 의미가 있다”는 말에 고 교수와 케냐의 전 고등교육부 차관이었던 사람이 바로 합류를 제안하면서 한국인, 케냐인, 한국교인 이렇게 세 사람이 주인이 됐다는 것이다.
고선윤 교수는 “글쟁이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하나로 아프리카를 알리는 일”이라며 “고선윤의 일본이야기를 통해 일본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아프리카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아프리카는 굶주리고 나약한 그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다. 그들이 미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다”면서 “그래서 아프리카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화가 신균이의 도움으로 올해 안에 그림책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프로필
<고선윤 작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공부했다. 이후 귀국해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1000년 전 일본 헤이안시대의 문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백석예술대학교 외국어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칼럼을 쓰고 책을 저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국경없는교육가회’의 멤버로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허세의 힘(스타북스>) ▲나만의 도쿄(한울) ▲토끼가 새라고(안목) ▲헤이안의 사랑과 풍류(제이앤씨) 등이 있다. 또 함께 저술한 책으로는 ▲놀이로 읽는 일본문화 ▲의식주로 읽는 일본문화 ▲동식물로 읽는 일본문화 ▲공간으로 읽는 일본고전문학 등이 있다.
이밖에 ▲이상적 풍류인 이로고노미 ▲헤이안 귀족의 미야비▲ 등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아울러 역서로는 ▲은하철도의 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철학책 ▲해마 ▲3일만에 읽는 세계사 등 7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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