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5 09:50 (수)
9명의 총재와 함께한 韓銀의 살아있는 역사
9명의 총재와 함께한 韓銀의 살아있는 역사
  • 김은정 발행인
  • 승인 2021.09.03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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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흘러가도 기록은 남는다’ 금통위 속기사의 마지막 조언 
최상원 속기사

 



외환위기, 한은법 파동 등 한국 금융사의 현장에 늘 함께 했던 이가 있다. 32년간 한국 금융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모든 회의를 낱낱이 기록했던 최상원 속기사다. 9월 은퇴를 앞둔 최 속기사가 털어 놓는 한은의 365일, 금통위의 속살까지 흥미로운 ‘비사’들을 리치가 들어봤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적은 속기록은 그 자체로 한은, 나아가 한국 금융의 역사다. 한은을 떠나는 그는 “삶은 흘러가도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는 말을 남겼다. 종이와 펜이 아니더라도 스마트폰, 블로그 등을 활용해서라도 기록의 흔적을 남기는 습관을 기르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이제 그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Q. 속기사로 32년을 근무하시고 9월에 은퇴를 하시는데 처음 입사 배경부터 퇴직까지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세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1989. 5월에 입행하였는데요. 당시 저는 모 대학(김천대학) 비서행정과의 속기학 강의 출강과 일반 기업의 주주총회 속기록 작성 등을 담당하는 프리랜서 속기사로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군은 임금, 고용 등의 측면에서 늘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은행에서 속기사 채용 공고가 나서 그에 응시했고, 정해진 인사관리 절차를 거쳐 입행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은에는 제 사부님(작고하심)이 혼자 속기사로 재직하셨는데, 비공개회의인 금통위 간담회를 속기록으로 작성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 당시 간담회 회의장은 본회의장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마이크 시설 등이 없다 보니 청력에 한계가 있고, 잘 듣지 못하면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되고, 한 명의 속기사로는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등 대체 속기사가 필요하게 되어 채용 공고를 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에피소드는, 1997년말 외환위기 때인데요. 당시 금통위 회의가 급박하고 빈번하게 개최되던 때입니다. 
12.11일에는 원래 회의 일정이 없었는데, 갑자기 임시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퇴근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는데, 오후 5시 23분에 금통위 간담회를 개최하여 중소기업 지원 방안 및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논의되었으며, 간담회 종료 후 곧바로 오후 6시 50분에 본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은행의 금융기관에 대한 총액대출한도 결정」을 의결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날 정시 퇴근 후 제 둘째 딸아이 유치원 재롱잔치에 가기로 했었는데, 결국 참석하지 못했고, 가족들은 아빠가 오기를 학수고대했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었고, 요즘 같으면 못 간다고 문자라도 보냈을 텐데 말이죠. 

Q. 지금까지 900여회 금통위 본회의를 기록하셨는데 일반인들이 알 수 없는 현장 회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A. 회의 분위기는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통방회의(통화정책방향회의)·금융안정회의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방회의의 경우는 본회의 전 주 경제상황 점검회의에서 그간 변화된 경제흐름을 지표 중심으로 파악하고, 본회의 개최 하루 전 동향보고회의에서는 「국내외 경제동향」, 「국제금융 동향」, 「금융시장 동향」을 심도 있게 보고·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이후 본회의에서 위원들의 의견 개진으로 통화정책방향이 결정됩니다. 이후 총재께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의사결정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여 국민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이렇게 통화정책방향이 결정되기까지 3번의 프로세스를 거쳐 결정되며 이와 같은 회의는 엄숙한 분위기보다는 학술세미나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심도있는 토론이 이루어집니다. 금통위원들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치열한 논의를 거쳐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죠.


금융안정회의는 통방회의가 개최되지 않은 3, 6, 9, 12월에 열리는 회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금융감독기관이 아닌 중앙은행 시각에서 우리나라 금융안정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대외에 공표하는 회의인 만큼 신중한 회의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봐야죠. 어느 회의 하나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엄중한 회의 분위기의 연속이라고 보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Q. 현재까지 9분의 총재님과 함께 회의 내용을 기록하셨는데 기억나는 전임 총재님들의 특징과 화법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김건 총재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성품이 조용하면서도 원칙주의자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총재직에서 물러나신 1998년 어느 날 ‘역대 총재와의 대담’ 기록을 위한 장소에 제가 배석한 적이 있는데, 당시 김총재님께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으로 “중앙은행은 외로운 직책이다, 원래 인기가 없는 것이니 인기를 얻으려고 하지말고 모든 걸 원칙에 따라 하면 결국 우리가 신뢰를 받는다, 기관 자체만을 생각해라” 이런 말씀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순 총재님은 잘 아시다시피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시면서 부총리를 지내다 한은 총재로 오신 분입니다. 외부에는 강하게 대하면서도 직원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시는 성품으로 기억합니다. 1992년 대선에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이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서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터무니없는 얘기를 해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고소를 해버렸죠. 추후 정주영 후보가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은행에 대해서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다”고 공식 사과를 함으로써 소를 취하했지만요. 평소 말씀하실 때는 중저음으로 “한국은행 직원들은 실력이 좋으니 책도 많이 쓰고, 글도 좀 자유롭게 쓰고 기고도 해라, 책임은 총재가 진다” 이런 말씀을 주로 하셨어요. 글을 쓸 때는 “국장, 이사, 부총재 등등을 거쳐 첨삭 같은 것은 받지 마라” 이런 식으로 직원들을 신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김명호 총재님 재직 당시의 시대상황은 국제화, 자유화, 정보화시대가 화두였거든요. 당시 김총재님께서는 전산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FRB 뉴욕의 전산시스템을 벤치마킹해서 BOK-WIRE를 개통하셨습니다. 아울러 BIS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국외출장을 가시거나 할 때 한은의 BIS 가입의 당위성을 계속 강조하시는 등 추후 한은이 BIS에 가입하는 초석을 놓으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80년대 말 한은법 개정 파동을 겪으면서 한은이 하는 일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자, 우리를 열자, 그런 생각에서 ‘열린 중앙은행’ 운동을 펼치셨는데, 우리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그것을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홍보부(현 커뮤니케이션국의 전신)를 강화하고 화폐전시실(현 화폐박물관의 전신)도 만들고 국민들을 한국은행에 견학도 시키는 등 홍보에도 적극적이셨죠. 


이경식 총재님은 1997년 외환위기 때 총재로 계셨던 분입니다. 역대 총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계셨던 총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IMF 프로그램과 통합 금융감독원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금융감독원을 설치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당시 은행감독원은 한국은행 내 조직이었으나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등을 통합하여 금융감독원이 설립되게 된 것이죠. 한은법 전면개정을 통해 은행감독원을 떼줘야 할 상황에 놓인 겁니다. 한은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직원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은행감독원 분리, 금통위 의장(당시 금통위 의장은 재무부장관)을 한은 총재로 한다는 명분으로 한은법 전면개정과 통합 금융감독원법이 제정되었던 겁니다. 그 당시 밀려오는 거대한 파고를 혼자서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어느 분이 총재 자리에 계셨던 들 그 외풍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강하게 풍기면서도 소탈하신 성격의 정이 많으신 총재님으로 기억됩니다.

전철환 총재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외환위기 직후 한은법 전면개정으로 금통위가 상근으로 변한 첫 번째 한은 총재(금통위 의장)로 오셨습니다. 금통위가 비상근 시절에 충남대 경제학 교수로 계시면서 금통위원을 겸직하셨으니 내부 사정을 잘 알고 계셨죠. 그런만큼 직원들과 화합도 잘 하시고 정부정책과도 조화를 이루면서 큰 무리 없이 4년 임기를 다 채우신 선례를 남기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직원들을 소탈하게 대하는 모습이 선합니다.


박승 총재님은 ‘한은을 가장 사랑하는 총재’로 기억되길 본인 스스로 바라셨듯이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이 사랑이었습니다. 에피소드 하나 말씀드리면, 식사도 소박하게 하신 편인 걸로 기억하는데요. 하루는 북창동 인근 식당(남원추어탕)에 점심 식사를 하러 오셨는데 비서역에게 직원 테이블을 파악하게 하시고 점심값은 결제하는 일도 있었고, 직원들에게 뭔가를 베풀려고 하셨죠. 특히 음지에서 고생하는 하급직원들을 더욱 격려하고 배려했던 기억이 오래 남습니다.

이성태 총재님은 비유법을 적재적소에 잘 구사하는 어법을 사용하십니다. 즉 “배를 항구에 제대로 대기 위해서는 항구가 보이지 않을 때부터 키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항구를 보고 나서 키를 움직이면 늦는다” 이런 식이죠. 선제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펴야 한다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하시곤 합니다.금통위 회의나 기자간담회 때에도 말씀을 절제되게 하시고 천천히 생각해 가면서 하시기 때문에 속기사들이 받아쓰기가 아주 좋은 스타일의 발언자 중의 한 사람이죠.

Q. 전문 경제 용어들이 많을 텐데 따로 공부를 하시는 건가요?
    
A. 입행 초기에는 전문경제용어들을 몰라 실수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니 당시 경제신문에 나오는 ‘경제용어해설’ 같은 기사를 스크랩하여 공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속기사는 전문지식을 깊게 알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용어에 대한 이해는 숙지하고 있어야 발언자의 의도를 제대로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매체를 속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에는 FOMC 의사록 등 각종 연관자료를 읽어보고 있고요. 특히 인터넷 환경이 좋아져서 생소한 단어가 나오더라도 네이버, 구글 등을 검색하여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신조어들이 탄생하므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검색이 최고라고 봐야죠.

Q. 평소 여유 시간 또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A. 외환위기 전으로 기억을 하는데요. 그 당시 문서부장(현 금통위실장)이 저에게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하신 겁니다. 그 당시에는 한은 속기사가 저 혼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제가 아파서 병원 신세라도 지게 되면 금통위 회의를 연기할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싶었겠죠. 그 말씀을 듣고 난 이후로 주말에는 등산과 마라톤으로 컨디션 유지, 건강관리를 해오고 있습니다. 

Q. 32년 뒤돌아보시면 가장 어려웠던 점과 즐거웠던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A. 어려웠다기보다는 추억거리가 생각나네요. 
1996년에 저의 사부님이 명예퇴직을 하시고, 저 혼자 속기사로 있을 때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금통위 임시회의가 급박하고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때거든요. 금통위실 직원들은 회의 개최 전일과 회의 당일까지 바쁘지만 저는 회의 당일부터 이후가 바쁘거든요. 회의가 길고 힘들게 끝나는 날에는 실장이나 팀장이 북창동에 소주라도 한잔하러 가자고 제안을 해도 저는 “오늘부터 야근입니다” 하고 사양을 하죠. 그러면 섬세한 실장이나 팀장께서는 제가 속기록 작성이 끝날 즈음에 다시 한번 오퍼를 내기도 하고 모든 게 감사하죠. 이젠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가장 즐겁다기보다는 보람 있는 일은, 금통위 회의 장소를 이전하던 때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50년 한국은행 창립 이래 금통위 회의 장소는 최초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 SC은행 제일지점(당시:조선저축은행, 현재 SC은행에서 신세계백화점에 매각) → 부산근대역사관(당시 부산은행집회소) → SC은행 제일지점 → 화폐박물관 → 한은 본관 → 삼성본관으로 6번 이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창립(1950.6.12.)되고 나서 13일 후 한국전쟁(6.25)이 발발하여 한국은행 임시본부를 대전에서 대구 및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UN군 참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다시 서울로 복귀하는 등 파란의 역사가 시작되었죠. 


제가 입행하던 당시(1989.5)는 한은 본관 15층에 금통위 회의장이 있었는데 동 회의장소는 1988년 1월부터 사용해서 삼성본관으로 이전하던 2017년 6까지 약 30여 년의 금융통화의 역사가 숨쉬었던 곳이기도 하지요. 2017년 6월 한은 본관 회의장을 삼성본관 대체 회의장으로 이전 시 회의 탁자 등 모든 집기·비품들을 그대로 이전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회의장은 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회의실 내 도청장비 시스템 등의 이전을 철저한 준비와 실행으로 회의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재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퇴직 후에도 금통위 회의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Q. 앞으로 은퇴 후 계획하시는 제2의 삶은 무엇인가요?

A. 한은에 입행하여 평생을 기록업무만 해왔으니 은퇴 후에는 그동안 해왔던 업무와는 다른 평소에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에서 제2의 삶을 구상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골프티칭프로(USGTF) 자격증을 취득해 놓았고 올해 생활체육지도사 2급(골프)도 합격(필기·실기·구술 합격 후 최종 현장실습만 남은 상태)하였으니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골프를 늦게 배우려는 시니어들이나 유소년들을 대상으로 골프지도자 생활을 할까 합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생활체육지도를 한다거나 티칭프로 자격증을 잘 활용해 볼 생각입니다. 평소 좋아하는 운동이니 하루 종일 몰두해도 지치지 않고 친절 티칭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Q. 리치 독자분들에게 당부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저는 평생을 기록쟁이로 살아온 만큼 둔필승총(鈍筆勝聰)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인데 ‘둔한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 ‘총명한 두뇌보다 거친 기록이 낫다’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네요. 처음에야 총명함이 붓을 이길 수 있겠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면 두뇌의 저장고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요즘에는 꼭 종이와 펜이 아니라 개인블로그나 스마트폰 등을 활용해서라도 기록의 흔적을 남겨 두는 습관을 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흘러가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입니다.  김은정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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