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2 10:05 (금)
‘종횡무진’ 신문용 작가
‘종횡무진’ 신문용 작가
  • 월간리치
  • 승인 2016.03.09 20:20
  • 호수 8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변(常變) 항동(恒動) 평면입체의 힘

가로축 위에서건 세로축 안팎에서건 늘 변하고 잠시의 멈춤조차 없는 자연세계의 생동이 시 이미지로 놓여 있다. 상하를 갈라 치던 형상의 질서 틀을 벗고 좌우 비산(飛散)의 형상을 선보인 신문용 작가는 결국 무궁무진 상변항동 하는 실체적 존재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평면입체의 한 전형이다.

리치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 본다.


이중현실이란 개념으로도 의사(擬似)자연이란 말로도 온전히 설명했다 하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가상현실은 더더욱 아니다.
본디부터 글과 말로는 이루 다할 수 없을 만큼 끝 모를 스토리가 한 없이 파생되고 있는 자연세계가 아니던가.
그런데 글이나 말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실체적 본질에 훨씬 가깝게 재구성한 이미지 한 토막 한 토막이 실존 자연보다 훨씬 더 광활한 상상과 감동 체험을 발화(發畵)시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상상하고 해석하고 부가적인 이미지를 한꺼번에 캔버스에 담아내려 몸부림쳤던 신문용 작가의 작품세계는 새롭게 탄생한 자연세계로 이끄는 창(窓) 혹은 통로다. 


연속-순환-생동 향한 修道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자연을 단순히 흠모한 나머지 그 현상적 요소를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이 내포한 본질을 찾아보는 시각적 이미지 표출이다.”(2012년 작가노트)
자연 그 존재자체가 변화의 다양성과 무궁무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은 겸허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까닭인 셈이다.
모방을 기본으로 하는 옮겨 담는 작업은 너무 구태의연하다는 생각, 모사(模寫)의 좁은 한계에 갇히길 바란 것이라면 캔버스를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자연 현상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가 이토록 무궁무진한데 작가로서 실험적 작업이 어떤 연속성과 감성적 형상의 표출로 이어질 것인지 집중하고 매진해 왔던 셈이다.
지금까지 반복했던 붓질과 그 이후의 부가적 작업이 수반한 연속성과 순간적 이미지 밑바탕에 심어 둔 생동감이 궁극의 시각적 이미지에 바짝 다가서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까마득 넘실대는 풍파의 始原

무려 30년 긴 세월에 걸쳐 바다 이미지를 형상화하느라 씨름해 온 작가라는 소개말이 이처럼 어울릴까.
윤진섭 평론가는 “신문용에게 있어서 ‘바다’는 세계 이해의 창이자 하나의 화두”였다고 말한다.
말 없이 넘실거리는 바다, 기상 조건에 따라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파도는 소재이면서 그 자체 주제이기도 하다.
“소재란 자연대상으로서 바다와 파도를 이름이요, 주제란 리듬에서 파생되는 회화의 한 요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대상으로서 바다와 파도를 그린 것이라기보다 그런 소재를 빌어 화면의 내적 질서를 꾀한 것”이라고 윤 평론가는 풀이한다.
구상화라기보다 한 편의 추상화라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한 시선이라는 이야기다.  


실감 진득한 구체성 낳는 비결

그런데도 그의 바다 그림은 감상자가 언젠가 마주쳤던 그 바다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이 계절 훌쩍 떠난다면 직접 마주할 것만 같은 바다 그 모습일 것 같은 실감이 묵직하게 울린다.
상상력과 작가의식이 배어든 화폭이 또 다른 실감을 낳게 되는 비결은 그만의 고된 작업방식에서 동력원을 찾을 수 있다.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에서부터 바로 눈 앞까지 몰려오는 파도가 흰 이빨 마냥 드러내는 포말들, 원근법으로 처리된 시각적 이미지가 우리 심상에 누적된 바다와 상통하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
여러 차례에 걸쳐 캔버스에 밑칠을 하고 칠이 마를 때마다 매번 사포질을 해서 캔버스의 바탕면을 반들반들하게 만든 뒤 나이프로 파도를 정교하게 그려낸다는 정교한 테크니션이라고 한다.
분명 감정이입을 배제하기 위한 기계적 작업 같아 보이는데 신문용 작가가 구축한 서정성이 절로 느껴진다.
“감정이입의 배제가 불러일으키는 서정성의 확보, 이 모순이 바로 신문용 그림이 지닌 신비가 아닌가 한다”라는 게 윤진섭 평론가의 풀이다.


소재 다양화 횡에서 종으로 변모

작품 창작 30년이 가까워지면서 신문용 작가의 작업은 변모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 뚜렷해졌다. 여전히 무제를 제목으로 한 구름과 폭포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작품군이 등장한 것이 그렇다.
고전 산수화가 보여주는 고답적 이미지 대신 현대적 다양한 변주와 실험적 작업을 통해 자연세계를 새롭게 형상화했던 그의 회화적 기량이 또 다른 진화로의 이행단계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물줄기의 생동감이나 구름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은 신 작가가 오랫동안 매달렸던 바다 그림 작업에서 자연스럽게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방향으로 체계화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첩첩이 배척하지 않는 공존

새로운 소재로 눈길을 돌렸다 해서 주제의식이나 심상의 변모가 온 것은 역시 아닌가 보다.
첩첩이 병렬로 늘어선 산세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보나, 첩첩이 위와 아래, 그리고 하나 너머 또 여럿 운집해 흘러가고 있는 구름을 담은 화폭이나.
그는 말한다. “자연의 이미지 표현에서 보이는 것은 자연에 대한 심상의 뜻으로 정의되는, 결국 자연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자연세계에 대한 신 작가의 지각과 인식에 누적되고 재해석 되는 과정의 총합. 사회 문화 역사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미지표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다양한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개별적 이미지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그러한 공존이 생동하는 집약체로서 광활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한 폭 캔버스로 떼어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그 한 폭 한 폭을 꿰어 보면 또 다른 신세계가 형상을 이룬다.

“하얀 종이나 캔버스를 볼 때마다 이 바탕 위에서 무엇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는지 그려 내고, 그 과정의 결과가 나에게 무의식의 긴장감과 걱정으로 엄습해 올 때, 나는 어떤 의무감이나 필연적 숙명을 짊어진 자의 고뇌를 느낀다.”
그의 창작의지는 자연이 지닌 생동감과 힘(Physis)에 뿌리내린 채 성장하는 숙명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