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4:18 (금)
시작도 끝도 한 점 작품에
시작도 끝도 한 점 작품에
  • 월간리치
  • 승인 2016.04.11 10:03
  • 호수 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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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 여행길에서 예술적 영감과 운명적으로 마주쳤던 이명준 작가. 온 몸을 태우고 나서야 변하지 않는 본질을 드러내는 연탄 그 자체만 쓰거나 거기에 안료를 더한 뒤 손수 정성껏 만든 한지에 입히고 부어 작품을 완성하면 거기 새롭고 끝 없는 감성적 충족과 성찰이 샘 솟는다. 리치에서 그의 창작세계를 조명해 본다.

몸 밖의 外境 독창적 서술들

찬 기온 속 먼 나라 낯선 건물들마다 듬성듬성 일정한 규칙성을 띠고 배치 된 창문들이 비추고 있는 제 몸 밖의 외경(外境)들이 거대한 충격으로 뇌리를 장악할 줄이야.
20 여년 전 부르클린에서 머물던 이명준 작가에게 마침내 운명이 찾아왔다. 때론 강하게 때론 흐릿하게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이웃한 존재들에 따라 걸음 옮길 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이미지들 형상들 때로는 기호들의 릴레이가 가져다 준 영감이 예술혼에 불을 놓았다.
이국풍 건물들마다 저마다 자리잡은 빼곡한 창문들. 일정한 모듈 형태의 격자 창문들마다 다채로운 햇살과 사연들이 날아드는 광경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란 있는 것인까. 변하지 않는 색채란 있을 수 있을까. 고대 알타미라 벽화의 재료를 떠올렸다고 한다.
산화된 철이 지닌 특유의 질감. 오히려 산화되고 나니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성질이 주는 경이로움은 무엇인가.


다 타고 나니 드러나는 본질들

사람이면 홀로 산다 해도 한 가지씩 사연이 있는 것처럼 사람 사는 곳에 창문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이명준 작가는 창문처럼 일상과 밀접한 연탄을 재료로 다양한 창작 시도를 한다.
태우고 빻고 보니 일곱가지 정도의 색상을 뽑아냈다. 그대로 쓸 때도 있고 안료를 섞어서 광물성 색료로 탈바꿈 시키기도 하다. 
때로는 산화철을 더하는 작업으로 먼 기억을 반추하는 시간의 통로를 열기도 한다.
유기물인 연탄이 다 타고 나면 무기물로 바뀌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색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명준 작가는 알려 준다.
“마치 모래나 바위의 색이 변하지 않듯이 연탄 또한 변화하지 않아요.”
직접 정성스레 종이를 만들고 색을 입히며, 그의 손을 거쳐 거쳐간 숱한 과정의 끝에 새롭게 태어난 작품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 타고 만 것에 새 생명을 불어 넣고 진정한 본질, 삶의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일. 부활인가 새로운 탄생인가 좁게 보이던 경계가 이렇게 지독하게 환해서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무한히 확장된 세계를 열어 보여 준다. 

 
손수 기울인 정성들의 잉태

이 만큼 알고 보니 왜 사람들이 그더러 “영원불멸의 색을 탐구하는 작가”라 칭하는지 알 만해진다. 손수 한지를 만들고, 역시 직접 만든 그만의 독특한 안료를 입히는지 칠하는지 덧씌우는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창작의 손길을 무수히 쏟아 붓는다. 혹시 ‘칠한다’가 아니라 ‘붓는다’가 더욱 어울리는 것 아닐까.
연한 질감의 한지와 강렬한 이미지 가득한 안료가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때로는 은은하고 때로는 강렬하며 또 어떤 때는 거치르고 메마르고 촉촉하기도 한 오묘함을 드러낸다. 
그의 예술작업으로 새로 태어난 존재는 2중의 생명력, 다중의 메타포어를 일으켜 보는 이에게 무궁무진한 감성적 교감을 길어 올린다. 붓고 또 부어서 감성적 충만함과 생의 의미, 시간의 역사, 시원(始原)과 종점이 따로일 수 없다는 깨달음을 길어 올리는 변환. 변하지 않는다는 색채가 끝없이 변환하고 늘 달라지는 우주 속 삼라만상 어느 한 존재의 한 때를 닮아 있을 따름이다.


사람보다 먼저 나중인 자연

그는 작가노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천지간에 펼쳐져 있는 경치. 하늘과 땅, 양지와 음지, 강과 바다, 늪, 공기와 빛과 흙 등은  내게 영육을 휘감아도는 듯한 감동을 무한히 제공한다.
때로는 전율 끝에 등줄기에서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그 아득하고 그윽한 것이 마음속에 담겨서 표현하고 싶은 욕구마저 느껴졌다.
그 아득하고 그윽한 것이 마음속에 담겨서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 뜨거운 불꽃을 일으키곤 했다. 내 가슴에서 빛나는 그것을 담아내려 하면 자연은 항상 드넓은 포용력으로 나의 표현 가능성보다 더 풍요로운 시각적 성찬을 차려 주었던 것이다”라고.
사람 이전에 먼저 있었고 사람이 다 갈 곳을 떠난 뒤에도 있을 자연과 우주를 아직도 배우고 깨달아가고 있는 예술가로서 이명준 작가의 삶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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