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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구, ‘空’과 ‘實’의 미학 소멸성 향한 묵시록
이실구, ‘空’과 ‘實’의 미학 소멸성 향한 묵시록
  • 월간리치
  • 승인 2016.07.11 09:21
  • 호수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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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할 틈도 없이 쉼 없이 달려가는 세상에서 예술은, 사람의 이성적 판단과 그 행위에 대한 확신에 차 있던 시대와 당연히 달라야 한다는 믿음. 결국 소멸하기 위해 생성된 존재들이 지닌 본질,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불가해한 내면과 실체성이 없음으로 존재한다는 진실을 회화에 담아온 이실구 작가의 작품 세계를 살펴본다.

“나는 나를 직접 본 적이 없다./나를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니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란 진실을 알았고 “완전한 나를 볼 수 없는 것”이며 “환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인간 이성에 대한 확신이 넘치던 무렵 기계 복제시대라고 불렸던 지난 세기 회화들이 견고한 물질성과 자기 확신에 바탕을 둔 이미지를 창작했다면 이 시대엔 적합하지 않다고 이실구 작가는 일찌감치 결론 내렸다.


원본 불확실성 시대 작가의식

“우리의 정신이 미처 파악할 새도 없이 사회의 모습은 파편화되어 우리의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과거의 회화가 대상을 재현했다면 거기에는 원본이 존재했다. 이미지가 회복된 지금 회화에서 원본은 그 의미를 잃었다. 예술 속에 담겨지는 우리 삶과 경제, 문화는 원본을 선명하고 뚜렷한 관점 속에서 나타내지 않는다. 그 표현은 난해하고 우리 이해력은 부족하다.”(2012년 한전아트갤러리 개인전 서문 중에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넘쳐나는 이미지들이 구축한 난해함은 무수한 매스 미디어들이 더욱 혼란스럽게 증폭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사진과 필름으로 고정된 이미지를 담아내려 했던 창작은 어울리지 않기에 그는 눈길을 아예 돌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변화를 관통하는 고정성이 아니라, 느리게 따라가는 것 뿐이 아닐까?” 너무 빨리 가고 소비되거나 소진되어 바뀌는 세상이 남긴 흔적들을 포착하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똑같이 옮길 수 없는 영적 언어

박응주 평론가는 이실구 작가의 회화를 놓고 “애초에 ‘형태’를 ‘기호’로 보려했던 접근이 문제였다”고 무릎을 쳤다. 이 작가의 작품에 드러난 기호체계가 드러낸 형태에만 의미가 있고 배경에는 의미가 없다고 여기려 했던 태도를 박 평론가는 철회했다. “배경이란 우주적 삶의 질서인 형태를 배태시킨 그 후광, 태어나려 몸부림치는 의미의 ‘언어거푸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벽 위의 익명적인 그라피티(graffiti)처럼 무작위한 외양을 띄고 있는 이미지들의 조작을 통한 상징체계의 해체와 복원, 예술 형상을 통한 현실구조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연속으로서 이실구 작가의 창작 활동은 이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직관성의 충돌, 간섭, 응축

찰나의 쉼도 없이 급변하는 불가해한 현실세계를 단편적으로 접근하기를 포기한 대신에 작가의 집요한 작업이 거듭할수록 독창적 미학의 그릇을 크게 넓혔다.
그의 오래된 작가노트를 보면 그는 스스로의 작업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선을 긋거나 색료를 덮을 때 신체와 화면 사이에 최초로 나타나는 행위와 지각의 여러 현상들을 기술하는 과정으로 돌입한다. 거기서 (나는)우연성이나 임의성을 인정하고 어떠한 필연성을 발견할 때까지 색료와 선에 의해서, 몸짓이나 형상의 흔적을 통해서 계속 나아간다”고.
작업할 때 그는 감정이나 생각을 은연중에 개입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개입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서 “나의 작업에서 형성된 선은 각기 서로 다른 힘을 가진 모습, 독자적인 모습으로 화면에서 다른 요소들과 충돌을 일으키며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그 자율성은 무의식에 의한 직관성의 발로”라고 설명한다.


오토마티즘이지만 개방적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이 작가의 작업을 놓고 초현실주의가 추구했던 오토마티즘과 달리 ‘개방적 오토마티즘’이라고 규정하는 논평들도 화단에서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즘은 손 빠른 자동기술을 통해 의식 통제를 벗어난 무한한 자유를 얻고자 하는 흐름이었다.
이와 달리 이 작가는 ‘순수한 무의식’ 개념을 거부한 채 창작과정에서 발생하는 외부요인의 개입을 용인하고 수용한다.
비단 오토마티즘에 국한할 게 아니라 예술의 근원은 인간 내면에 어떻게 접근해 갈 것인지에 대한 철학의 문제이고 존재의 내면 성찰에 들어간 그 시점에도 내외부적으로 작동하는 요인들에 의해 내면의식이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성찰의 결과 또한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무의식의 표출일 뿐 아니라 현실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롭게 표출되는 의미가 있고 그는 작품에 반영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무의식과 더불어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잠재돼 있던 세계관, 기억 저편 숨어 있던 기억들이 찰나의 섬광으로 폭발하고 다녀갔던 잔상, 한국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깃든 동양적이고 한국적이며 서구적인 조각조각 표상들이 끼친 영향들의 총합체로서 회화로 드러나는 셈이다.


필연적 돌발의 흔적이 집적

이실구 작가의 화폭에서 두드러지는 돌발적인 흔적들은 미리 의도했거나 계획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형식만이 존재하는 선과 색의 행위로만 시각적 차원의 자극을 주는 형상화로 이뤄진다. 반복된 행위를 동반하는 유희성과 전 과정의 결과로 촉발하는 흔적과 선의 연속성에 반응하게 된다는 점에선 전통적 오토마니즘의 요소를 띈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이 집합체를 이루기까지 신체가 행하는 작업 속도는 언제나 빠르다고 한다. 거침없는 작업 도중 흘러내리거나 뭉개진 물감 덩어리 등의 돌발적 흔적들에 즉각적이고 자발적인 빠른 작업이 다시 연속되며, 지우고 그리고 뭉개고 또 흘러내리는 순환이 있을 따름이다.
순간 순간 우연히 변형하고 왜곡하는 작업에 순서나 뚜렷한 법칙성이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최후에 남는 흔적들로만 외형을 드러낸 작품엔 소멸되기 위해 생성됐던 존재들에 대한 기록이 이미지로 형태를 갖출 따름이다.
김옥렬 평론가는 이 작가의 <Untitled> 연작을 두고 ‘파편화된 생명, 이중의 자기응시’라고 평했다.
일상의 이미지를 단순하게 해체하거나, 혹은 난해한 자기 도피적 탐구에 빠져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상징적 기호를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잘못 본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추상적 이미지 속에 심어 놓은 식물의 파편들은 이중의 자기응시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존재의미와 법칙을 비추는 화면

“이중의 자기응시는 연못이나 습지를 통한 생명응시의 한 방식”이라고 풀이했다. 내재적 힘에 대한 응시와 미분화된 공간인식을 통해 생명존재에 대한 불안함이 읽힌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무한 반복을 박제된 자연의 파편으로 표현했다고 봤다. 생명의 유한성을 더욱 강하게 유한화함으로써 실체에 다가서려는 것처럼.
아울러 생명의 진체를 응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몸짓의 언어로 형상화했으며  식물이미지의 변주가 상하 수직으로 대기와 하나되어 부유하는 모습은 물 속 생명과 대기 속 생명이 일체감을 형성하고 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생명에 대한 자기응시가 내적 호소력과 일체감을 이루는 화합과 공존의 공간이 몰아일체의 생명의식으로 승화됐던 점에도 주목했다. 조화와 일체화된 상호작용 관계로서 공존을 그려냈다면 내적 화합의 실현으로 새로운 현실과 존재인식의 기능태를 열었던 것으로 평가 받았다.
이 작가는 일찍이 “소멸되는 움직임의 象이란 방향잡힌 사물의 움직임이자 질서이며, 이는 내가 세계를 향해 주시하는 근본적 존재의미, 존재법칙”이라고 고백했다.
또한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들이고 감상자는 보이는 것을 불러들인다”는 독특한 신념을 지닌 채 창작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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