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5 15:25 (일)
명품 문화 정석을 엿보다···에르메스(프랑스)
명품 문화 정석을 엿보다···에르메스(프랑스)
  • 유지선 프랑스특파원
  • 승인 2024.08.31 19: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佛, 럭셔리의 상징이 되기까지 

 

전 세계 명품의 중심지로 프랑스를 꼽는다. 패션과 예술, 미식 문화를 사랑하며 최고의 최고만을 취급하는 고집과 자부심이 곧 수많은 명품을 만들어낸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명품이 세계적인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며 프랑스라는 국가의 브랜드에 이바지해왔다.

이러한 명품 문화의 중심에 선 프랑스의 부호들은 그 이름에 걸맞은 자부심을 걸고 사회에 돌려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단순히 부를 과시하는 것을 넘어 예술과 전통, 장인 정신이 어우러진 명품을 통해 고유의 가치를 표현한다.

프랑스의 대표 브랜드, 에르메스가 바로 이러한 프랑스 명품 문화의 정석을 보여준다. 검소한 시작부터 현재 프랑스 부호 2위의 자리를 지키는 에르메스 가문과 그들이 지켜온 브랜드의 행보에 대해 알아본다.

에르메스(Hermès)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파리에서 설립한 프랑스의 패션 기업이다. 수공업을 통한 높은 품질과 인위적으로 높이지 않는 가격 정책, 그리고 수천만 원에 육박하는 초고가 가방으로 유명하다.

원래 1800년대 주요 운송, 이동 수단인 말을 위해서 말과 관련된 마구 용품과 안장을 제공했으나,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가방이나 지갑과 같은 제품도 추가했다.

마차 모양 로고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에서 기원했다. 프랑스에서 가방에 최초로 지퍼를 사용해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이는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세계 대전 중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지퍼를 보고 들여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와 그의 사위 로베르 뒤마는 에르메스를 글로벌 명품으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방 외에도 액세서리, 향수 등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하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다.

현재 에르메스는 가방과 의류 외에도 주얼리·액세서리, 향수를 비롯한 뷰티·코스메틱, 라이프스타일 제품까지 다양하게 섭렵하고 있다. 에르메스의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이른바 ‘부의 상징’으로 일컫는 버킨백과 켈리백이 있다.

이는 1960년대를 주름잡던 패션 아이콘 제인 버킨과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딴 가방이다. 특히 버킨백은 명품 업계에서도 거대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데, 일반 고객이 구매하기 위해서는 우선 브랜드에서 일정 금액 이상의 제품을 구매하며 실적을 쌓고, 수년에 달하는 대기 명단에 들어야 한다. 이는 높은 수요에도 수공업과 품질을 고집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공급을 통제해 희소성을 높인 전략이다.


에르메스는 2023년 기준으로 매출액 약 1340만 유로 (한화 약 198조 원), 시가총액 2000억 유로(2263억 달러)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우며 세계 2위의 명품 그룹 자리를 굳혔다.

현재 에르메스 지분의 66.7% 정도를 에르메스 가문과 친척들이 보유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 상위 명품 기업 중에서도 매우 희귀한 케이스다. 현재 CEO인 악셀 뒤마는 창업주의 6대손으로, 에르메스 일가의 친척인 뒤마 가문이다.

그는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 졸업 후에는 프랑스 투자은행 BNP파리바에서 8년간 일하며 미국 뉴욕과 중국 베이징에서 거주했다. 르 몽드에 따르면 2003년 에르메스 생산 부문을 담당했던 그의 어머니가 숨을 거뒀을 때 당시 CEO이자 뒤마의 삼촌인 장 루이 뒤마가 찾아와 에르메스에 합류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윽고 뒤마는 재무 부문에서 시작해 주얼리 사업을 키워냈고 이후 에르메스 본사인 프랑스 사업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2013년부터 CEO직을 맡고 있는 그는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맞서 가문을 결집한 인물이라 불리고 있다. 2010년 10월 LVMH 그룹에서 에르메스 지분 14.2%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식을 발표했는데, 당시 에르메스는 처음으로 가문 일원이 아닌 전문경영인 파트릭 토마가 CEO로 재직할 시기였다.

LVMH그룹은 수많은 명품을 인수하며 에르메스 지분율도 23%까지 늘렸다. 당시 나머지 지분 73.4%는 에르메스 가문 일원 200여 명에게 분산돼 있었는데, 에르메스 가문은 지분 50.2%를 모아 지주회사를 만들고 오너 경영으로 회귀했다.

악셀 뒤마가 CEO로 취임하자, 다음 해 LVMH는 에르메스 인수를 포기했다. 당시 명품 업계의 트렌드는 이른바 ‘명품의 기업화’였는데, LVMH와 케링 그룹, 리치몬트 그룹 등 명품을 거느린 명품 재벌들이 등장했다.

장인의 수작업으로 이름을 높인 브랜드들이 수요를 맞추고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중국 등에서 대량생산을 하며 명품을 공장화했다. 매출은 뛰었지만, 품질이 떨어졌고 가품이 늘어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에르메스는 달랐다. 악셀 뒤마는 장인 정신을 고수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에르메스 가죽 제품은 지금도 프랑스에서만 생산된다. 글로벌 직원 약 1만7600명 중 장인만 5000명이 넘으며 연간 가죽 제품 생산량 증가율은 6~7%로 맞춘다. 장인 육성을 위해 2021년에는 에르메스의 이름을 딴 학교 ‘l’Ecole Hermès des savoir-faire(에콜 에르메스 데 사부아페르)’ 도 설립했다.


악셀 뒤마의 CEO 재임 기간은 혁신과 전통을 신중하게 균형 맞춘 것이 특징이다. 뒤마는 특히 에르메스의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데, 그는 에르메스가 명품 기업이 아닌 최고 품질의 상품을 만드는 장인 기업이라고 말한다.

에르메스에는 마케팅 부서가 없다. 제품에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로고가 없어 소위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제품 철학을 고집하고 있다.

전반적인 브랜드 이미지에도 통제가 매우 엄격한데, 명품들이 유명인 협찬과 행사 초청, 브랜드 앰배서더 지명 등으로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는 데 반해 에르메스는 유명인과의 협업도 거의 하지 않는다.

에르메스 VIP 제품은 주요 고객층은 저명한 정치인, 기업인, 법조인이나 그들의 부인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에르메스 비공개 VIP 행사에는 VIP 중에서도 더 엄격 등 품질 경영을 하고 있다.


악셀 뒤마의 경영 전략은 해외 진출, 사업 다각화, 디지털 강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글로벌 진출에 속도를 내어 2014년 중국 상하이에 세계 다섯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 ‘메종 에르메스 상하이’를 열었고, 폴란드 시장에도 진출했다.

2023년 기준 에르메스는 세계 45개국에 294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가죽 제품에 치우쳐 있던 제품군도 확장했는데, 2020년 에르메스 뷰티를 론칭하며 향수와 코스메틱 사업을 강화하기도 했다.

초고가의 가죽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제품군까지 섭렵하며 브랜드의 이미지를 낮추지 않으면서도 신규 고객의 유입을 늘린 것이다. 외에도 애플과 협업해 애플 워치 에르메스와 같은 새로운 제품 라인을 도입하면서 브랜드의 다각화를 노리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 뒤마는 디지털 변환과 더불어 지속 가능성을 중요한 전략적 기둥으로 삼았다. 에르메스는 2001년 명품 업계 최초로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지만, 모바일로 바뀌는 트렌드에는 뒤처졌다.

악셀 뒤마는 2017년을 ‘디지털 변화의 해’로 부르며 미국과 유럽에 있던 온라인몰을 재정비하고 세계 29개 국가로 확장했다. 또 친환경적인 관행에 투자하며 지속 가능한 소재를 조달하고 탄소 발자국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프랑스의 간판 명품으로서 에르메스 역시 예술계에 다양한 투자를 하며 협업도 잦다. 대표적으로 에르메스의 실크 스카프인 ‘까레’(Carre) 시리즈는 화려하고 컬러풀한 색채, 수려한 그림과 디자인으로 유명한데, 이 스카프의 마니아층은 단순히 착용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술 작품 사듯이 수집하기도 한다.

일명 ‘에르메스 에디터’로 불리는 프로젝트는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계 거장들과 손을 잡고 특별한 스카프 에디션을 제작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티스트로는 프랑스 행위예술가 다니엘 뷔랑, 미국 추상화가 요제프 알버스, 일본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 등이 있다. 


에르메스 재단에서는 에르메스 코리아 주관으로 수여되는 ‘에르메스 미술상’이 있다. 이는 외국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문화예술계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수상자는 프랑스의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을 선보이고 파리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회를 얻는다. 이 미술상은 에르메스 가문의 오랜 전통과 장인 정신을 예술 분야에 접목해 창의성과 혁신을 장려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단순한 명품을 넘어 한 가족이 세대를 거쳐 지켜온 전통과 장인 정신의 산물이다. 브랜드 기업화 대신에 가족 경영을 유지하는 경영 철학, 품질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브랜드 철학 등 모든 면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가족경영, 오랜 역사와 유산, 전통과 혁신의 적절한 공존, 남들이나 유행이 아닌 그저 ‘최고’만을 고집하는 특징들에서 프랑스의 부호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에르메스뿐만 아니라 와인, 가구 등 장인과 공방에서 시작한 사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에르메스가 가문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 나가며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전략을 펼쳐나갈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유지선 프랑스 특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