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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에 강감찬 장군과 충무공의 탄생 근원이 있다
봉천동에 강감찬 장군과 충무공의 탄생 근원이 있다
  • 이종천 풍수학회 회장
  • 승인 2024.09.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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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대첩·한산대첩 명장의 탄생

 

서울 관악구 봉천동 218-17번지에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인 낙성대(落星垈)와 약 300~400m 위에 장군의 사당 안국사가 있고, 건너편의 덕수공원과 관악 구민운동장 사이의 작은 산골짜기에 정정공 이변(貞靖公 李邊)의 묘가 있는데, 공은 충무공의 5대 조(五代 祖)이며 필자는 이 묘의 명당발음(明堂發蔭)으로 충무공이 탄생했다고 판단하며 충무공 조상의 선산을 모두 확인해 본 결과다. 이렇듯 관악산 아래 작은 마을에서 국가의 존망이 걸렸던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조국을 구한 3대 대첩 중 귀주대첩과 한산대첩의 명장 탄생과 관련된 대 명당 터가 두 곳이나 있으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전자는 양택(陽宅 : 주택·건물·터) 명당(明堂)의 발복을 받았고, 후자는 음택(陰宅 : 묘지) 명당(明堂)으로써 명당 발복엔 음◇양택의 구분이 없다는 증거다.

강감찬 장군(948~1031)
 
강감찬 장군은 잘 알려진 사실과 같이 고려 정종과 현종 때의 사람이다. 본관은 진주고, 부인은 함양 오씨다. 특히 장군은 원래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한 문무를 겸비한 장군으로서 1018년 벌어진 제3차 거란과의 전쟁인 귀주대첩 당시 71세의 나이에 부원수 강민첨 장군과 고려군 20만 명을 지휘해 거란 군사 10만 명을 몰살시키고 나라를 구한 영웅이며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오른 분이다. 거란족은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를 단 3일 만에 멸망시키고 지구상에 그 흔적을 없애버렸듯이, 만약 고려가 패했다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질 전쟁이었다.
낙성대는 장군의 탄생 전날 ‘상서로운 별(문곡성)이 떨어진 터’ 이자 관련 설화도 많다. 즉,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고 했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하고 국자 모양의 맨 앞 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파군성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강감찬은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한 문신으로써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 거란족을 물리쳤으니 우리나라의 큰 홍복이 아닐 수 없다. 1974년 낙성대가 성역화되면서 생가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됐는데, 낙성대의 유래를 표시한 비석, 장군의 유허비, ‘강감찬 나무’라는 향나무가 있었으나, 현재의 나무는 1987년 고사 된 후 고양시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매해서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낙성대를 풍수지리학으로 해석하면, 한남정맥- 관악지맥의 생기 맥(生氣 脈)이 안국사 뒷산을 지난 후 횡룡(橫龍) 입수(入首)하고, 낙성대에 일점(一點)의 명당혈처(明堂穴處)를 작국하고 있는 등 영웅의 탄생 근거를 형세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덕수 이씨(德水 李氏) 가문은···

덕수 이씨는 조선의 상신 7명, 대제학 6명, 청백리 2명, 공신 4명, 문과급제자 105명, 무과급제자 267명, 조선 최고의 천재 율곡 이이(13세 손), 불세출의 명장 충무공(12세 손),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13명을 배출했다. 특히 우리나라 화폐 5만 원권에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5000원권에 율곡 이이, 100원의 동전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이 있을 정도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다. 이이(李珥)와 충무공은 19촌 간이라고 한다.


대제학 李邊 公과 충무공의 가계(家系)

이변 공은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판사재시사 이공진과 모친 정씨 사이에 태어나 세종 1년(1419) 식문과 진사, 승문원 박사, 중추원 부사(1448), 이, 공, 병조참의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예문관 직제학, 우사간을 거쳐서 1456년(세조 2)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뒤 공조판서,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 영중추부사를 역임했는데, 대제학(정2품)은 정승(정1품)보다 품계는 낮지만 ‘정승 열 명과 안 바꾼다’는 자부심과 ‘가문의 영광’인 관직인데, 공의 손자 이거(충무공 증조부)는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증손 백록(충무공 조부, 10대)은 정치적 혼란기에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조광조 등 소장파 사림들과 뜻을 같이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변을 겪게 된다. 충무공의 부친 정(貞, 11대)은 벼슬길이 막히자 관직의 뜻을 접고 살면서 부인 변씨와의 사이에 의신(義臣), 효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을 두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충무공이 조카들을 모두 키웠다 하며 장조카 완(莞)은 충무공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한 후 전쟁이 끝나자 무과에 응시, 급제하고 의주 부윤을 역임하던 중 병자호란 때 전사했다. 한편, 충무공은 원래 문과에 뜻을 두었으나, 조부가 역적모의(?)에 가담했다는 전력 때문에 문과로는 입신양명이 어려움을 알고 22세 때 충남 아산에서 살면서 무술을 배우기 시작, 28세에 과거시험 중 낙마해 낙방하고, 32세 되던 1576년(선조 9) 식년 무과에 급제했다.


이변 공의 묘가 대 명당인 이유

관악구 봉천동 산 53-1 정정공 묘가 충무공을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대 명당 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변 공 묘는 ‘작은 골짜기’에 있으나 이곳으로 오는 내룡맥이 백두대간(속리산)-호서정맥(칠장산)-한남정맥(백운산)-관악지맥(국사봉)-매봉-관악산(630m)을 거쳐 온 대간룡(大幹龍)의 주맥(主脈)이며 주맥에 큰 자리가 있다.

관악산을 경복궁 쪽에서 보면 불꽃을 닮은 화산(火山) 형태다. 화산 아래에는 명당이 없다고 하는데, 정정공 묘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관악산 주봉은 험한 바위산이지만 연주암 좌측으로 늘어선 능선은 힘 있고 아름다운 토산(土山)으로 박환해 소나무가 무성하며 소나무 숲은 맥로(脈路)의 통과를 용인한다.

특히 관악산을 지나 이변 공 묘역으로 오는 용맥(龍脈)은 연주암에서 서울대 쪽으로 기복 지현하며 행룡하다가 서울대로 넘어가는 길과 교수촌(낙성대 방향)으로 가는 삼거리길 우측의 수려한 문필봉(文筆峰)을 거쳐 덕수 공원 뒷산의 정정공 묘역까지 평탄. 후부(厚部)하고 기복 지현하며 긴 능선을 지나 이변 공 묘소 뒤 혈성산에서 생기(生氣)를 결집한 후 공의 묘에서 결혈(結穴) 하니 성웅의 탄생지로 손색없다.


풍수지리에서는 주산을 제일 중요하게 본다. 조. 안산(朝. 案山)과 수(水)는 다음이지만, 정정공 묘에서 보이는 조산(관악산)은 장엄하고, 안국사를 지나 낙성대의 뒤와 인헌초등학교로 연결된 안산(낙성대 뒤의 능선)은 건물의 숲으로 변해 본래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5층 이하로 일률적인 층고 제한을 하다 보니 능선의 스카이라인이 마치 컴퍼스로 그린 듯하고, 힘 있는 어병사(병사가 주군을 둥글게 호위하는 형태의 산)가 잘 환포한 형국으로서 이런 어병사가 조. 안산에 있으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태어날 큰 자리로 본다. 

 
마지막으로 명당의 조건에서 중요한 수(水)의 흐름을 보면 교수 촌과 강감찬 장군 사당 앞을 지나 인헌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면서 궁수형으로 원을 그리며 흐르는데, 용호(龍虎)가 관쇄해 기의 흩어짐을 완벽하게 막아준다. 


정정공 이변 묘의 풍수적 판단···
지무십전(地無十全)

풍수 격언에서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도 열 가지가 다 완벽한 땅은 없다”는 표현을 쓸 때 ‘지무십전’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변 공의 묘의 주 용맥은 한남정맥·관악지맥으로 연결되는데 명혈이지만 청룡이 약해 후손들이 각종 전란의 희생양이 돼 천수를 누리지 못해 안타깝다.
정정공 이변 묘는···

풍수에서 힘 있는 좌청룡이 혈장을 길고 힘 있게 감싸 주면서 바람을 잘 막아주면 자손이 번성하고, 힘 있는 우백호가 오른쪽에서 혈장을 잘 감싸주면 재물에 유리하거나, 딸이나 외손이 번창한다고 해석한다. 특히 필자가 충무공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덕수공원 뒤편에 있는 정정공 이변 공 묘는 청룡이 정정공 묘의 제전과 일직선으로 마주한 후 급격히 낮아지고, 용세가 약해지는 바람에 고조부 묘 이하 후손들의 묘는 장풍이 되지 못한다. 증조부 묘 등은 아예 청룡 능선에 조성되는 등 문제가 많아 후손들이 산화를 피하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 됐다. 특히 충남 아산시 어라산에 있는 충무공 묘 도한 명혈(明穴)이 근처에 있음에도 유해를 혈심에 안장하지 못해 후손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된 사람이 많은 사실과 같이 아무리 좋은 터를 찾았다 하더라도 산역을 잘못하면 흉사를 피할 수 없다는 증거다.


충무공 조부와 후손들의 흉사

전술한 바와 같이 충무공 조부는 중종 시절 벼슬을 하지 못했으면서 조광조 등과 교류하다 기묘사화에 연루돼 화를 당하고 자식과 손자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입혔다. 손자들(이순신 장군의 형들)도 단명했다. 충무공 또한 원균의 모함을 당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약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다가 석방된 후 노량에서 전사했다. 조카 완(莞)은 충무공의 맏형 희신의 아들로서 부모가 일찍 돌아가자 삼촌(충무공) 슬하에서 자랐으며 충무공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완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임종을 지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을 대신해 전쟁을 지휘했다. 완은 7년 전쟁이 끝나자 전공(戰功)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음직으로 벼슬을 얻을 수 있었지만, 당당히 무과에 응시해 급제하고 평안 병사 이괄의 난에 참전, 큰 공을 세웠지만 사촌 동생이자 충무공의 서자인 이훈과 이신은 이때 전사했다.


충숙공 이홍무
  
충무공의 4대손 이홍무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인 조카 이봉산을 만나러 청주에 왔다가 이인좌의 반란군에게 붙잡혀 역모에 가담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버티다 맞아 죽었다.


이봉상

충무공의 6대손 이봉상은 충청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인 1728년 청주성에서 이인좌가 소론 세력인 정희량, 태안현감 박필현, 평안감사 이사성, 포도대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등이 일으킨 반란군들에게 붙잡혔는데, 이들은 충무공의 후손인 이봉상을 회유, 가담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이봉상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충무공의 후손인 내가 충의를 배신할 수 없다”며 반항하다 살해됐다. 이렇듯 충무공의 조부, 형제, 후손들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고, 본인과 후손들은 국가에 충성하다 전사하는 등 불행이 비껴가지 못했는데, 필자는 조상 묘에 문제가 있어 산화(山禍)를 당했다고 본다.  참고 자료: 문화재 관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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