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반의 도시 춘천의 강 건너 서면(西面)에 가보면 최소한 세 번은 놀란다.
첫째는 이처럼 맑고, 넓고, 아름다운 호수와 용화봉, 등선 봉, 청운봉 등 삼악산 3봉과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 장군봉 등 힘 있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배산임수의 지세는 한 폭의 동양화 와 같은 경관을 자랑한다.
둘째, 1967년 의암댐이 완공되고 담수가 되기 전엔 한 명도 없던 박사학위 취득자가 1968년부터 2024년 3월 31일 현재 210명이나 된다. 초 중등 교장급 이상 교육자 130명, 5급 이상 공직자 100여 명이 배출됐다고 한다.
셋째, 이것을 통계 수치로 환산하면 춘천시 서면의 가구 수 약 1800세대, 인구 3530여 명, 10개의 법정리 중 약 8.5가구당 박사 1명, 13.8가구당 교장급 1명, 18가구당 5급 이상 공직자 1명이 배출됐기 때문에 ‘서면에서 박사나 교장을 자랑 하면 팔불출에 속한다’는 속설이 있다. (춘천 서면의 인물 배출 현황·박사마을 회보)
서면의 명당 지세(地勢)
춘천시 서면의 박사마을은 가덕산(858m), 북배산 (869m), 계관산(737m) 장군봉 등 힘 있는 산의 정기를 받고, 마을 앞에는 북한강에서 흘러오는 맑은 물이 된섬(위도)을 지나 상·중도 앞에서 소양강물과 합수(合水)해 의암호를 만들면서 호수의 모양이 궁수 형(弓手形)으로 마을을 환포(環抱)하고, 배산임수(背山 臨水)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명당 지세를 이루고 있 다.
특히 합수처는 음(陰)과 양(陽)이 교구 하면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합수처에 유명한 도시가 많다.
비보(裨補)풍수 풍수에서 지무십전(地無十全)이라고 해 아무리 큰 명 당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터는 없으므로 지세가 허약 한 부분을 댐이나 조림 등 인공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비보 풍수’라 하는데, 엄밀히 말해 서면 박사마을 을 품고 있는 의암호는 단지 국가가 경제발전에 필요 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서면 박사마을을 비보한 것이 돼 의암호의 담수 이전과 이후의 마을들은 천지개벽이 된 것처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즉, 당시 서면에서 춘천 시내에 가려면 북한강, 소양강 등 두 개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도 없고, 물살은 빨랐기 때문에 서면에서 생산된 농림산물(農林産物)을 춘천 시내에 가서 팔기도 쉽지 않았고, 두 강물이 빠르게 흐르면서 산수(山水)가 동거 (同居)하는 형세는 주위를 저기압 지대를 만들면서 주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재물이 빠져나가는 등 치명적인 주거. 교육환경도 열악해 인물이 배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대로 경작하던 농지의 침몰 등 주민들이 원하지도 않은 의암댐이 건설되고, 다리가 생겼으며 마 을 앞에 맑은 물이 고이면서부터 바람도 잔잔해지고 기(氣)가 모이는 고기압 지대로 바뀌는 등 완벽한 명당 지세로 변했다.
이렇듯 전력 생산 목적의 의암댐은 뜻하지 않게 이곳 서면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해 최고 의 명당 지세로 바꾸었으며 부모들의 교육열과 자녀 들의 향학열이 조화를 이루어 많은 인물이 배출되는 지역이 됐다고 보인다.
인걸지령(人傑地靈) 박사마을에서 확인되듯 산세가 수려하고 맑은 물이 고인 곳에서 인걸이 많이 배출된다는 것은 풍수지리 가 미신(shamanism)이 아닌 자연과학이라는 증거 다. 의암댐은 1961년 착공하고 67년 완공되자 북한 강과 소양강물이 담겨 큰 호수가 됐다.
춘천시가지와 삼악산 등 주변 자연환경과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호수 중앙에 상·중도와 위도가 일자 문성(一 子文星 : 누운 목성이라 한다) 형태로 떠 있다.
풍수에서는 묘지, 또는 마을 전. 후에 문성(文星)이 있으면 걸출한 인물이나 학자가 배출된다고 해석한다. 의암댐은 중력식 콘크리트 둑으로서 수문 14개와 높 이 23m, 제방길이 273m, 총저수용량 8000만 톤을 자랑하는데 호수의 물은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박사마을은 댐이 완공되기 전 인 1967년까지 한 사람도 없던 박사(博士)가 댐의 담수가 끝난 1968년부터 2005년까지 100여 명, 2019 년 12월 현재 173명, 2024년 3월 31일 현재 210명 의 박사를 배출했으니 이것은 풍수지리 이론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서면은 전북 임실군 삼계면 (21개 里중 7개里 160여 명),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한마을 30~40가구 중 18명), 경북 영양군 주실 마을 (14명)과 함께 4대 박사마을로 꼽힌다. 박사마을 최고의 명당 혈처(穴處)는 어디인가? 그렇다면 박사마을에서도 최고의 명당 터가 따로 있는가?
있다면 어디쯤일까? 필자가 조사해 본 결과 금 산리 마을에 있는 한승수 전 총리의 생가가 진혈 명당 (眞穴 明堂)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 터는 장군봉에서 오는 강력한 기운이 융취 된 생기명당(生氣明堂) 인데, 증축하기 전의 주택은 우리나라 제1호 풍수 박사이자 양택풍수의 권위자인 박시익 박사가 ‘양택풍수 이론’으로 설계했다.
박사마을의 선양 탑엔 부자 박사(한승수·상준), 부부 박사 배출 가문으 로 기록돼 있다.
박사마을의 대표적 인물 이곳 서면 출신 1호 박사는 1968년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송병덕 박사이고,
대표적 인물로는 한국인 최초의 영국 요크대 경제학 박사이자 요크대, 케임브리지대, 서울대 교수, 국회의원(3선), 상공, 재정 경제원, 외교통상부 장관, 주미대사, 대통령비서실장, 경제부총리, 제56차 유엔총회 의장, 대통령 특사, 국무 총리를 역임한 한승수 박사로서 서면의 3호 박사이며 한 총리의 부인 홍소자(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씨는 31호 박사이고, 한승수 전 총리의 아들도 박사다.
이렇듯 한 전 총리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인촌 김성수 가문과 함께 장관, 국회의원, 총리 등 요직을 역임하는 등 최고의 명당 발복을 받은 가문으로 이름나 있고, 국내에서 이만한 발복의 경우를 찾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한 전 총리의 명당 발복(출세) 근원에 대해 알아본다.
춘천시 서면에서 박사가 제일 많이 배출된 금산리에 면사무소가 있고, 그 뒷산이 장군봉인데 장 군봉은 청격(淸格)의 금성(金星) 형(形)이자 마을 쪽으로 개면 했다.
산 아래에 한 전 총리의 생가가 있는데 내청룡이 가까이서 감싸고 있는 등 터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기감(氣感)을 해 보니 장군봉에서 오는 강력한 생기가 한 전 총리의 생가로 들어간 후 회전하면 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풍수학에서 금형 산이 청(淸) 하면 관성(官星)이라고 하여 벼슬하는 사람이 태어난다고 하는데, 한 전 총리의 생가터는 위 풍수 이론의 표본과도 같다. 서면에서 박사가 많이 배출되는 이유 풍수지리학은 산천(山川)의 형세 (形勢)와 기상(氣像)을 평가 해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길흉화복(吉凶禍 福)을 논하는 우리 고유의 자연과학으로서 산 수(山水)가 날카롭고 험하면 그 고장 사람들도 사나우며 산수가 유순하고 후부 하면 사람들도 부드럽고 인심이 좋고 주산이 군계일학격으로 뛰어나고 용맥이 힘차게 뻗어 내린 곳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태어난 다고 해석한다.
사람들은 태어난 고장의 산천과 환경 의 영향을 받고 살아온 것은 자연의 섭리다. 역사적으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풍수지리에 일가 견이 있던 정조 대왕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석재(碩 齋) 윤행임(尹行恁)은 조선 8도 사람들의 인물평을 할 때 산천의 형세를 근거로 평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경기도는 거울 속의 미인(鏡中美人)이요, 충청도 는 맑은 바람 밝은 달처럼(淸風明月) 생겼고, 강원도 는 바위 밑의 옛 불상(岩下古佛)이요, 황해도는 돌밭 을 가는 소(石田耕牛)다.
전라도는 바람앞의 버들가 지(風前細柳)며, 경상도는 눈 속의 고독한 소나무(雪 中古松)요, 평안도는 용맹한 호랑이가 숲에서 나오는 (猛虎出林) 형상이요, 함경도는 진흙밭에서 개들이 싸우는 형세다(심재열 저 양택 생활풍수 35p)”라고 평가했는데 충북 제천. 단양지방을 ‘청풍명월의 고장’이 라고 하는 말은 이때 생긴 말이다.
그러나 춘천시 서면은 여느 강원도의 산천과 달리 험 한 바위산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세가 부드 러우면서도 빼어나고 들판도 넉넉하고, 의암호의 맑 은 물이 항상 고여있는 호반의 도시로 변했다.
그런데 서면의 23개 마을 중 금산리, 신매리, 방동리, 서 상리, 현암리, 월송리, 오월리, 덕두원리, 당림리, 안보리 등 10개 마을에서만 박사가 배출됐다는 사실은 마을의 지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박사마을은 주위의 산들 이 마을을 감싸안아 바람을 막아주고, 아름답고 힘 있는 산의 용맥을 타고 오던 생기(生氣)가 호수와 만나기 전 마을에서 멈추는 곳이다. 특히 의암호수의 물이 궁수형으로 환포하고 있는 지세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마을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서면은 동쪽을 바라 보고 있어 춘천에서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다.
주민들은 부지런하고 교육열이 대단해 70년대 다리가 없어 배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교통상의 불리함을 인내심으로 극복했다.
선양탑에는 ‘학자금 마련을 위해 어머니들은 산나물과 채소를 광주리에 이고 나룻배를 타고 시장에 내다 팔았고, 아버지들은 채소 등 농산물 생산에 힘써 자식 뒷바라지하는 일에 힘쓴 덕분에 서면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됐으며 그 전통은 계속되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의암댐은 재물의 보고(寶庫)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본다. 물도고여 있는 물과 급히 흐르는 물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의암댐이 없던 시절 박사 마을은 북한강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이 빠르고, 소양강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바람을 동반해 마을 쪽을 들이치니 좋은 기운을 빼앗아가는 저기압 지대가 형성돼 주민들의 건강에 문제가 있을수밖에 없고, 건강하지 못하면 의욕이 상실되고 노력을 게 을리하니 재물도 모일 수 없다.
그러나 댐이 생기고 물이 고이자 강(江)바람도 잠잠하고, 화살같이 박사마을 을 쏘는 형국의 소양강물이 의암호에 갇히면서 음양 (陰陽)이 교구(交媾 : 음과 양이 결합하는 곳. 남과 여가 결합하는 것. 음양이 沖. 和하는 공간으로 生氣가 충만 하다) 하여 살기 좋은 기운(瑞氣)이 머무는 곳이 됐다.
건강을 찾은 주민들이 열심히 일하고, 농림산물을 춘천 시장에 내다 팔았더니 살림이 윤택해지고 돈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여유가 생긴 주민들은 자식을 공부시켜 편히 살게하려는 바람으로 교육열도 높아져 자식들을 경쟁적으로 유학 보냄으로써 수많 은 박사가 탄생 된 ‘교육의 성지’로 탈바꿈했다고 본다.
이곳 주민들은 돈을 벌어 호의호식하는 대신 ‘자 식 농사 비용(교육비)’으로 투자한 것이다. 선양 탑 주민들은 1999년 10월 마을 입구에 ‘박사마을 선양 탑’을 세웠는데 높이 4m의 탑엔 박사학위를 취득한 순서대로 성명, 연도, 학위 수여 대학, 전공, 출신지 등이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다.
이곳 선양 탑에 기록 된 2024년 기준 마을별 박사 배출 현황을 보면 한승 수 전 총리의 생가 마을인 금산리 42명, 신매리 37명, 현암리 22명, 방동리 32명, 서상리 19명, 덕두원리 20명, 월송리 24명, 안보리에서 7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특히 한 집에서 네 사람의 박사(박종진·숙일·정일· 정원), 3부자 박사(최국지·신양·신건), 부자 박사(한승 수·상준, 성기준·건용, 홍순철·유표, 송병기·문규, 윤 종삼·헌영), 부녀 박사(홍순우·진숙), 모자 박사(홍소 자·한상준), 부부 박사(한 승수·홍소자), 외 6쌍과 3 남매 박사(송병두·병운·병선), 남매 박사(홍은표·소자)도 있는데, ‘2024년 3 월 31일 박사마을 회보’에 따르면 남양홍씨 문중에서 만 23명의 박사가 배출됐 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