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은 수많은 트렌드로 점철된 한 해였다. SNS와 숏폼의 영향으로 매일같이 새로운 유행이 떠오르고 사라지는 가운데, 럭셔리 업계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이 변화를 눈치채고 거기에 적응하고자 움직인다.
다만 수없이 쏟아지는 트렌드의 가짓수, 트렌드의 수명이 짧아져 감에 따라 매번 유행을 따라잡고자 하는 것을 되돌아보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2025년은 어떤 해라고 예상해 볼 수 있을까? 지난해 11월 진행된 파리 럭셔리 서밋(Paris Luxury Summit)은 바야흐로 ‘크로스오버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경기 불황과 정치적 변화 등으로 럭셔리 소비가 줄어드는 요즘, 업계 종사자들이 지금 주목하는 것은 무엇일지 알아본다.
파리 럭셔리 서밋은 프랑스 럭셔리 매거진 CB뉴스 (매거진과 CB 사이 스페이스 추가)와 메이저 프랑스 미디어 회사 퍼블리시스 미디어(Publicis Media)가 공동 개최하는 행사다.
매해 럭셔리 업계 종사자들이 한곳에 모여 다양한 주제에 관해 발표하며 토론이 오가는 자리다.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생생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지난 11월 개최된 2024년 서밋에는 구글, 유튜브 프랑스, 틱톡, 어도비, 퍼블리시스 럭셔리 등의 기업은 물론 아트 디렉터,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전반적으로 럭셔리와 테크, 광고계와 트렌드에 관한 주제가 프로그램을 장식했다.
11주년을 맞은 2024년 서밋의 메인 테마는 ‘크로스오버’였다. 사전적 의미로 크로스오버는 ‘활동이나 스타일이 두 가지 이상의 분야에 걸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분야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즘 말로는 흔히 ‘세계관 충돌’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현재 트렌드는 생각지도 못한 다른 분야에서부터 영감을 받거나 직접 협업함으로써 보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 핵심이다.
이는 최근 경기 불황과 물가 인상 등으로 명품 소비를 줄이기 시작한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나온 전략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간판을 건 2024년 서밋에서 트렌드와 관련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디지털과 럭셔리의 융합: 새로운 소비자 경험 창출
- 유튜브와 럭셔리 브랜드의 협업: 디지털 콘텐츠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컨대 샤넬은 중국에서 열린 ‘메티에 다르(Métiers d’Art)’ 런웨이 쇼를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공개하며 전 세계 소비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했다.
- 구글의 검색 트렌드 변화: 소비자들은 점점 더 길고 구체적인 검색어를 사용하며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검색 경험을 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구글은 가상 비서 프로젝트 ‘ASTRA’를 통해 더욱 정교한 맞춤형 검색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정통과 모방, 진짜와 가짜의 경계: ‘진정성’의 새로운 정의
- 유사품이 새로운 표준이 되다
(Dupe is the new normal)
- 가짜를 통해 진짜를 찾다
(Fake it until you find your truth)
- 진정성과 창의성의 충돌
(Authenticity vs. Creativity)
공급망이 글로벌화되고, AI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럭셔리 업계에서는 ‘진정성’과 ‘가짜’의 개념을 재정의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럭셔리 제품에서 영감을 받거나 모방하는 일명 ‘저렴이’ 제품 또는 ‘듀프’ 제품의 부상으로 명품, 럭셔리를 재정의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리얼리티 프리빌리지(Reality Privilege)’가 새로운 럭셔리가 될 것이며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허무는 접근이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럭셔리와 스트리트웨어의 지속적인 결합
- 루이뷔통은 오랜 전통 속에서 스트리트웨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17년 스트릿웨어 브랜드 슈프림과의 협업 이후 스트릿웨어가 브랜드의 핵심 DNA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 2024년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유산을 이어받아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래퍼이자 프로듀서)가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음악과 패션을 결합하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 스포츠와 럭셔리의 결합도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루이뷔통은 테니스, 농구, 축구 등의 스포츠에서 영감받아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으며 2025년에는 더욱 다양한 스포츠 브랜드와 협업이 예상된다.
이토록 업계에서 강조하는 크로스오버의 예시로 럭셔리 업계에서 자주 보이는 케이스가 있다. 럭셔리 브랜드와 니치 브랜드 (또는 젊은 디자이너)의 협업, 유명 IP 비즈니스(Intellectual property, 특허·상표·디자인 등 지적재산권 활용)가 바로 그렇다.
첫 번째 케이스로는 2017년 처음 선보였던 루이뷔통×슈프림 컬렉션을 뽑을 수 있다. 당시 루이뷔통은 젊은 고객층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모던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슈프림은 스케이트보드 문화로 시작해 10~20대 남성층을 사로잡은 스트릿웨어 브랜드였다. 가방 하나를 사기 위해서 매장 밖에 줄을 서는 것으로 유명한 루이뷔통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에 매장이 5개밖에 없어 늘 2시간 이상 대기해야만 했던 슈프림의 만남은 당시 패션계를 놀라게 했다.
럭셔리의 대명사 루이뷔통과 ‘요즘 힙한 애들’의 정의 그 자체였던 슈프림의 협업은 두 브랜드의 정체성을 적절히 섞은 좋은 사례로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있다.
컬렉션은 루이뷔통의 시그니처인 가방과 트렁크, 슈프림의 시그니처인 스트릿웨어 의류(모자·후드티·팬츠)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루이뷔통의 모노그램과 패턴, 그리고 슈프림의 상징인 붉은색을 더해 독특하고도 신선한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이 협업으로 루이뷔통은 영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더할 수 있었고, 슈프림은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었던 브랜딩을 좀 더 고급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다음으로 가장 흔히 보는 협업의 종류로 IP 사업을 고를 수 있다. 이는 럭셔리 업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 사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는 종류로 접근성과 인지도 둘 다 잡을 수 있는 장점이 특징이다.
2024년을 강타한 IP 사업으로 50주년을 맞은 ‘헬로 키티(Hello Kitty)’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24년은 그야말로 헬로 키티의 해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협업 제품과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었다. 의류, 라이프스타일, 테크, F&B까지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가 헬로 키티와 만남으로 통통 튀는 브랜딩과 제품을 출시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가 있는 캐릭터, 한눈에 알아보기 좋은 그림체와 색, 헬로 키티 캐릭터만의 귀여움이 더해져 새로운 소비자들을 입문시키기에도 아주 좋은 케이스였다. IP 사업의 강점으로는 다양성과 다변성을 꼽을 수 있는데, 브랜딩과 적절한 방향성만 잡힌다면 IP의 라이센스를 구매해 바로 제품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개중에서도 특히 성의 있는 디자인과 브랜딩을 내세운 제품만이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헬로 키티뿐만이 아니라 디즈니와 지브리 등 유명 캐릭터 IP를 보유한 제작사들이 가장 쉽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모델이 바로 이 IP 사업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2022년부터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로, 유명 브랜드의 타 분야 진출 또한 크로스오버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부상하고 있다. 이전에 서술한 브랜드와 브랜드의 만남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브랜드가 직접 완전히 다른 분야에 뛰어듦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에 색다른 터치를 더하는 것을 뜻한다. 패션 브랜드가 F&B 사업에 진출하거나, 테크 브랜드가 뷰티로 확장한다던가 등의 예시를 들 수 있다.
이 케이스의 대표주자로 럭셔리 패션 브랜드 생로랑(Saint Laurent)을 주목하면 좋다. 생로랑은 타 럭셔리 브랜드와 비교해 과감한 시도를 많이 선보인다. 2019년에 패션위크 기간 한정으로 오픈했던 카페가 큰 인기를 얻어 현재는 일반 소비자도 즐겨 찾는 유명 스팟이 됐다.
여기에 힘입어 2025년 1월 생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가 피터 파크 셰프와 손을 잡고 생로랑 이름을 건 럭셔리 스시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생로랑의 ‘스시 파크’는 올해 2월 말 오픈했다. 럭셔리와 F&B의 만남이라는 의외성에 더해 ‘럭셔리’를 단순한 소비 행위를 넘어 하나의 ‘경험’을 선사함으로써 더욱 창의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렇듯 다양한 시도를 볼 수 있었던 지난해에 이어 2025년의 트렌드 전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 비럭셔리 분야의 부상: 럭셔리 패션의 성장 둔화로 인해 비럭셔리 분야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다.
-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 증대: 중국을 넘어 새로운 아시아 시장이 럭셔리 브랜드들의 주요 타깃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 디지털과 현실의 융합: 디지털 자산과 실제 제품을 연계한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 문화적 크로스오버 가속화: 음악과 미술, 테크놀로지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해 브랜드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2025년 럭셔리 트렌드는 단순한 제품 판매를 넘어 소비자와의 관계 형성,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브랜드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팝 컬처와 럭셔리, 리얼과 가짜의 경계를 허물며 더욱 창의적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협업과 크로스오버 전략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럭셔리 브랜드의 핵심 성공 요인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 간의 성공적인 협업 사례를 바탕으로 업계는 더욱 다양하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2025년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크로스오버’ ‘협업’ ‘확장’이다. 패션과 테크놀로지, 럭셔리와 팝 컬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허무는 트렌드는 2024년부터 이어진 협업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소비자들과 소통하며 브랜드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있다. 2025년은 럭셔리의 개념이 더욱 확장되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융합되는 흥미로운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지선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