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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화백 “화면 곳곳에 산재된‘숨겨진 차원’의 전율”
장지원 화백 “화면 곳곳에 산재된‘숨겨진 차원’의 전율”
  • 월간리치
  • 승인 2012.10.10 17:37
  • 호수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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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사물의 만남’ 혹은 ‘자연과 사물의 친화관계’라는 수사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회화세계는 그래서 보는 사람을 편안한 마음의 상태로 이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스의 화가 보나아르가 일상의 정경을 화면에 옮김으로서 ‘앵티미스트(친밀파)’라는 칭호를 얻었듯이, 장지원 역시 이를 테면 ‘일상적 심상주의자’라는 별칭이 보다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소재를 비근한 일상에서 얻고 있으며 그러한 소재를 일련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심상적 이미지로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 곳곳에 산재된‘숨겨진 차원’의 전율”

‘자연과 사물의 만남’ 혹은 ‘자연과 사물의 친화관계’라는 수사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회화세계는 그래서 보는 사람을 편안한 마음의 상태로 이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스의 화가 보나아르가 일상의 정경을 화면에 옮김으로서 ‘앵티미스트(친밀파)’라는 칭호를 얻었듯이, 장지원 역시 이를 테면 ‘일상적 심상주의자’라는 별칭이 보다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소재를 비근한 일상에서 얻고 있으며 그러한 소재를 일련의 내면화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심상적 이미지로 변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心象)은 사전적인 뜻으로 풀이하자면 ‘관념으로 재생산된 인상’을 일컫는다.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이해된 실제 대상의 이미지는 흔히 왜곡되거나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어린이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령 새가 외 씨 모양으로 갸름하게 표현된다든지, 집이 사각의 입방체로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 본다(seeing)고 하는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지각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금세기의 탁월한 형태 심리학자인 루돌프-아른하임(Roudolf Amheim)에 의하면 인간은 대상을 볼 때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단순화의 원리는 외계의 복잡한 현상이나 패턴을 단순하게 도식화 하려는 행동양식이다.

‘심상적 이미지’ 그려낸다

‘장지원이 화면에 그려내는 이미지들은 심상적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아른하임이 말한 것처럼 ‘단순화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이미지를 가리켜 ‘시각적 판타지아’(이일)니, ‘심흔(心痕)의 서술’(김복영)이니 하는 평자들의 해석은 그래서 타당하다.
그의 회화세계는 상상(想像) 의존적이며 심상 지향적이다. 휠더린이 시인은 상상의 세계에서 ‘제비처럼 거침없이 산다’고 읊은 것처럼 그는 그림의 세계에서 무한한 상상의 자유를 구가한다. 상상의 자유야말로 예술가에게 부여된 특권이 아니겠는가.
숨겨진 차원은 장지원이 지난 십여 년 동안 자신의 작품에 일관되게 붙여온 명제이다. 이 명제는 드로잉의 성격이 강조된 80년대 중반 무렵의 작품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음영의 차이로 화면의 분할을 시도했던 그는 다양하게 분할된 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명제를 붙였지 않았나 짐작된다. 마치 퍼즐을 풀듯이, 화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사물의 이미지들을 쫓아 그 의미를 해석하는 일은 그의 작품이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각별한 재미이다.
상당히 변모하기 했으나 장지원의 근작에는 이 무렵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화면에 아주 작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일상적 사물들이 그것이다.
교회, 새, 달, 새장과 같은 사물들은 비록 작게 축소된 형태이긴 하나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꽃, 나무, 구름 등 화면의 주축을 이루는 소재에 부가된 이들은 그림의 설화적 성격을 강화하는 가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그런 이유로 해서 더할 나위 없이 아기자기하다. 평면적으로 처리된 화면은 리얼리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박진감은 없으나 그 대신 동화적 소박미와 잘 정제된 아동화와 같은 소탈함을 보여준다.
꽃, 나무, 구름, 달, 새와 같은 자연 대상에 교회, 집, 새장, 시계 등의 일상적 사물을 병치시킨 화면은 이러한 대상들의 서로 조응하는 가운데 만들어 내는 이야기와 구조적인 긴장감으로 인하여 더욱 풍요로워 보인다.
“나는 꽃이나 새, 그 무엇을 그리든지 너무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고 봐요. 하지만 많이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조금은 보여주거든요. 그리고 어떠한 형태를 화면 속에 만들 때 정말 만드는 것은 전체의 어우러짐을 위한 형태지요. 그렇게 하면서 화면의 조화를 만들어 나가는데 물론 등장하는 모든 소재는 나름대로 상징성이 있어요.”
그의 그림이 지닌 조화적 측면과 상징성은 필연적으로 여백이 강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귀결이었으며 그 결과 화면은 주대종소법(主大從小法), 즉 주가 되는 소재는 크게 그리고 부속적인 소재는 작게 표현하는 고대 동양화의 화법을 연상시키는 기법으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여백이나 주대종소법과 같은 모양의 전통적 화법에 기대고 있는 그의 화풍은 비록 의식적인 행위의 결과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회화세계가 지닌 정체성의 문제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이미 진부해진 명제이긴 하나 전통을 오늘의 상황에서 재해석하는 일이 이 시대 작가들에게 맡겨진 소임이라고 한다면 장지원은 이러한 문제를 조용히 실천해 가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마티에르’ 눈길

장지원의 그림에서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화면의 마티에르이다, 아크릴 칼라를 중첩해서 바르는 그의 기법은 물감의 두터운 물질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판지로 콜라쥬한 것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는 새, 나무, 꽃 등 주된 소재에 집중돼 있는데 이러한 돌출감은 보는 자의 시선을 끄는 요소가 된다.
그의 그림 일부에서 보이는 오브제적 요소는 이러한 특성을 더욱 진전시킨 것이다. 우드락을 캔버스의 표면에 부착한 뒤 그위에 거대한 꽃을 그린 근작은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시도이다.
그는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화면을 더욱 단순하게 만드는 동시에 상징성을 배가하여 여백의 의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회화에 대한 그의 실험정신은 다수의 소재를 사상(捨像)시키고 꽃과 새라는 단순한 소재에 집중하는 근작에 잘 드러나 있다. 장지원의 예술적 재능이 잘 나타나있는 이 몇 명 근작이야 말로 그의 회화세계가 지는 지향성을 예측하게 하는 바로미터가 아닌가 한다.<윤진섭 평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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