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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부총리 유쾌한 변화 앞장 선다
김동연 부총리 유쾌한 변화 앞장 선다
  • 월간리치
  • 승인 2017.06.10 16:19
  • 호수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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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적 통찰력과 조정력이 검증된 유능한 경제관료”(문 대통령의 지명 이유) “모든 부처를 아우르는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기재부 과장급 직원) 당면한 경제·사회·교육·금융 현안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상황에서 경제부총리 후보자에 오른 김동연 전 아주대 총장. 리치에서 그의 우직했던 성장과정과 공직 철학 등을 조명해본다.

“상고-야간대 출신 경제사령탑 후보…고졸신화”라는 반응도,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 통합 이후 처음으로 예산 분야 경력이 많은 관료 출신이 경제수장에 오르는 일은 ‘통념을 깬 인사’라는 평가도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보다 기획재정부 차관과 국무조정실장까지 거쳤던 경력이면 충분하다고 봤기 때문에 경제부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이와 달리 우리 사회 주류의 시선은 상고 출신이 야간대학을 나오면 대학을 다닌 것으로 치지 않고 고졸 출신인데 파격이라는 말로 추켜세우려 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김동연 부총리 후보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같은 구태의연한 시각으로 본다면 그의 본질을 이해하기 불가능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2008 위기극복·2030 비전 기여

문 대통령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로 김동연 총장을 지명한 5월21일 "기획예산처와 기재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경제에 대한 거시적 통찰력과 조정능력이 검증된 유능한 경제관료란 점에서 지금 이 시기에 경제부총리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시간상으로 가깝게는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리나라 경제에 심각한 위기로 다가 왔을 때 위기 극복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당시 김 후보자는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과 국정과제비서관으로 일하며 뛰어난 업무 추진력과 기획력으로 위기 극복 대응책 마련과 집행에 기여했다.
2011년에는 기재부 예산실장을 지내며 기획·조정 능력을 갖추고 시야도 넓어 각종 예산과 정책을 연계해 이슈를 선도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보다 훨씬 앞선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6년에는 기획예산처 재정전략실 전략기획관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중장기 발전전략을 담은 ‘비전 2030’을 수립하는데 한 몫 했다.


여러 영역 얽힌 현안 해결 적임

이같은 기획력·추진력에 국무조정실장을 거친 경력까지 더해지면서 사회 양극화와 고령화 진척에 따라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현안 타개책 마련에는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획재정부로 출범한 이래 거쳐 간 경제부처 수장들은 대부분 경제정책, 금융, 세제 등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관료들이나 학계 출신들이 많았지만 김동연 후보는 에산업무를 두루 거친데다 우리나라 전체 예산을 책임지는 예산실장이나 2차관을 지낸 점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김동연 후보는 예산통이면서 재정·기획·금융 분야까지 경험한데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하며 위기극복 대응책에 기여했고 박근혜 정부에선 국무조정실장을 맡기도 했다.
최근 문제인 정부가 누리과정 예산을 중앙정부가 책임지기로 하면서 이슈가 됐던 것처럼 저출산 고령화 정책을 비롯한 복지 현안은 한 두 부처에만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여러 부처에 걸쳐서 예산이 어떻게 구성되고 특정 현안에 가용할 수 있는 재원이 어떻게 산재해 있는지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미국 유학시절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던 이력도 주목받는 대목이다.


유쾌한 사회변화 이끌 리더

우리 사회 주류의 시각보다 아주대 총장으로서 그를 소개한 글을 보면 경제부총리 후보의 됨됨을 훨씬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에 든 이래 공직자는 모름지기 ‘사회변화에 기여’하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정책결정론을 전공한 학도(學徒)로서 현실세계에 개입한다는 관점에 입각했으며 우리 경제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결정과 집행에 소신을 다했다고 소개한다.
정책 입안과 실행을 떠나 김 후보자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실행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는 철학을 다졌던 사람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자기자신 그리고 우리사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려는 적극적 행동을 두고 그는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물리적 충돌과 피 내음이 나는 그런 반란이 아니다. 건전한 변화를 추구하는 반란이고 결코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해야하는 것이기에 ‘유쾌한 반란’이라고 이름 지었다. 실제 그는 청년층에게 건전하고 유쾌한 반란을 권유하고 소통하는 자리를 자주 가졌던 인물로 알려졌다.


3無인생 3有인생 굴하지 않아

충북 음성 출신인 그는 11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 그는 덕수상고 졸업도 하기 전인 열일곱 살에 홀어머니와 세 동생을 부양하고자 한국신탁은행에 취직했다.
학업을 잇고 싶은 열망에 일과 병행해서 장장 8년간 야간대인 국제대(현 서경대)에 다녔다. 
낮엔 은행원으로 일하고 밤엔 공부한 끝에 스물다섯 살이던 1982년 입법고시에 합격했다. 같은 해 행정고시도 통과하며 이듬해 3월 경제기획원(EPB)으로 옮겼다.
김동연 후보의 특질을 놓고 어느 언론매체는 ‘돈, 학력, 인맥’이 없는 3무 인생이지만 ‘꿈과 열정,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의지와 행동’이 있는 3유 인생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3무 요소 가운데 그에게 확실히 바뀐 것은 학력 정도다. 공직생활 도중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에 이어 국비장학금과 미국 정부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시간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이다. 물론 돈은 아주대 총장시절 연봉의 4할 정도를 사회에 기부하는 것으로 축재보다는 베푸는 삶을 살았다. 인맥의 경우 또한 사사로이 줄을 서거나 하지 않았던 공직자로 회자되고 있다.


‘선공후사’ 원칙 철두철미

명문고,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수두룩한 경제부처에서 그가 차관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치열함과 철저함을 앞세워 업무 능력을 인정받는 과정이었다.
2011년 기재부 예산실장을 지내며 기획·조정 능력을 갖추고 시야도 넓어 각종 예산과 정책을 연계해 이슈를 선도했다는 평을 들었던 그는 2012년 기재부 제2차관, 2013년엔 장관직인 국무조정실장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모나지 않고 합리적이며 맡은 일엔 몸을 던지는 외유내강 스타일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때때로 여당의 정책도 반대하는 소신파로 손곱힌다.
차관 시절에도 밤늦게 퇴근하는 버릇은 부총리 후보로서 업무를 보면서도 다시 선보이고 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하던 때엔 백혈병으로 투병하던 장남이 이승을 떠난 상태에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을 마친 뒤 아들을 떠나보냈고 발인 당일 오후 출근할 정도로 公적인 일을 먼저 앞세우고 사적인 일은 뒤로 미루는 선공후사(先公後私) 원칙에 철두철미했다.
이런 성품에 헌신하는 공직자였기에 공직생활 중 홍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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