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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근우 화가 “미술이 있기에 삶이 즐겁고 행복하다”
임근우 화가 “미술이 있기에 삶이 즐겁고 행복하다”
  • 월간리치
  • 승인 2011.05.12 01:37
  • 호수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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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임근우 화백은 항상 긍정적인 사고방식 안에서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즐거운 인생을 가꾸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가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고 꼽는 것은 다름 아닌 ‘미술의 존재’ 그 자체다. 때문에 다시 태어나도 화폭 앞에 서고 싶을 정도로 미술을 삶의 위대한 신앙으로 생각한다. 현재 임 화백은 꾸준한 작품 활동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후학 양성에도 열정적이다. 임 화백을 만나 한국미술의 미래를 들었다.

Q.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로 과거로 미래를 반추하고 있다는 것이 꼽히는데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A. 지난 1990년 첫 개인전부터 ‘Cosmos-고고학적 기상도’를 줄곧 작품명제로 삼았다. 이 명제에 메시지를 함축시켰다. 지난 시간의 상징인 ‘고고학’과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는 ‘기상도’ 개념을 하나로 묶어 나만의 질서와 시스템으로 재구성한 우주(Cosmos)를 선보이려고 했다. 아마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가 현재의 작가 자신이며 소통의 수단은 바로 꿈이다. ‘인생이 살맛나게 해주는 것은 꿈이 실현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 잘 전달된 것 같다.

Q. 작품을 보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작품에 초대한 사람을 누구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다. 비록 당장 가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나마 깊은 위안과 행복하고 풍요로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을 구현해내고자 했다.

Q. 고고학적 상상력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란 평을 듣고 계신데 자리매김한 계기가 있는지.
A. 유년의 추억이 한 몫을 한 것 같다. 고향인 춘천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많았다. 이것은 더없이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놀이터이자 꿈의 타임캡슐이었다. 어린 나에게 고인돌은 완벽하고 견고한 건축 자체였다. 미적 감수성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경험은 작품의 평생 주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패턴을 바꿔 놓았다. 어쩌면 유년기에 고인돌 위에 앉아 먼 옛날의 그들과 만났던 행복한 꿈속의 수수께끼들을 지금까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 같다.

Q. 어린 시절 탐구심을 무척 많았던 것이 아닌지.
A. 어린 시절 고인돌을 벗 삼아 지냈다. 집에서 20km가 넘는 거리에 지석묘가 있었다. 고무신을 신고 고인돌이 있는 곳 까지 아침에 가서 고인돌 속에 들어가서 누워보기도 하고 위에 올라가서 엎드려 보기도 하고 옆을 보듬어 보며 끌어안기도 했다. 5000년 전에 살았던 고대 인류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었다. 한나절 또는 하루 종일을 사색 하면서 고대 인류와 대화를 하고 저녁 때 집에 돌아와서 종이를 꺼내놓고 고인돌을 크레용으로 비비면서 형태감 보다 고대 인류의 손길이 묻어난 고인돌의 질감을 표현하곤 했다.

Q. 그렇다면 고인돌이 인생의 패턴을 바꿔놓은 계기가 됐나.
A. 고인돌과 함께 할 당시 내가 존재하기 전의 시간이 궁금했다.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할아버지는 기억이 나는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궁금하고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궁금하고 그랬다. 그래도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몇 백년, 몇 천년, 몇 만년 그 오래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한 의문이 강했다.

Q. 학창시절이 궁금한데 어떻게 보냈는지.
A. 초,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학교를 가고 싶어서 간 적이 없었다. 스스로 하는 것에는 굉장히 집중력을 가지고 임하지만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시키는 교육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교육가 집안이었다. 때문에 나만의 스타일대로 살아간다는 것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을 뛰어넘을 용기는 없었다. 결국 미술부에서 그림 그리는 걸로 만족을 하면서 꾸역꾸역 학교를 졸업했다.

Q. ‘만능 엔터테이너’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A. 아마 활동영역이 방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평면회화와 입체조각, 설치작품에 이르기까지 화가에서 설치미술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월드컵 시즌이던 2002년의 설치작품이다. 당시 상암월드컵경기장 앞에 담양에서 공수해온 2002개의 대나무 장대에 10만장의 오방색 깃발을 매단 작품을 설치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오색창연 휘날리는 깃발은 마치 월드컵의 성공을 염원하는 온 국민의 함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장관을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Q. 그동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흥미로운 작업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A. 우선 2003년에 예술문화공간이 태부족하던 경기 의왕시에 ‘찾아가는 전시회’의 일환으로 현장 설치전시를 기획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백운호수 주변에 설치했는데 일반 관람객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고려함은 물론 국제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이밖에 강변 깃발설치, 해외 공연을 나가는 국악팀의 무대설치, 의왕시 한성기백제시대 모락산성의 고고학적 흔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발굴프로젝트 작품,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로 비유하며 플라스틱 의자 100여개를 사용해 한양대학교 박물관 벽에 설치했던 작품, 버려진 음료수 페트병으로 만든 ‘플라스틱 트리’ 등을 꼽을 수 있다.

Q. 평면작품 외에 설치나 입체작품에 능하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A. 미술을 전공하기 이전인 1977년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정식으로 먼저 전공했다. 물론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어릴 적 꿈을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다. 고인돌이 축조됐던 원시시대의 모습을 기술적으로 좀 더 완벽하게 구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발판이 되어 그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Q. 1977년 대학에 입학한 당시 전공은 미술이 아닌 건축공학이었는데 이유는.
A. 평생 화가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다른 계통의 학문을 선수 학습하고 싶다는 결심 때문에 건축공학을 선택했다. 대학에서 4년간 건축 공부했던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늦게 시작하더라도 후에 미술대학을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뿌듯했다. 건축이야말로 오늘날 저의 미술세계를 지탱하는 정신적 배경이자 매력적인 경험의 배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당시 옛 건축물을 공부했던 덕분에 오늘날 ‘고고학적 기상도’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셈이다.

Q. 작품에서 드러난 것들을 보면 스스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A. 사실 이미 존재하는 답은 시시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에 대해 나 자신에게 끈질기게 질문했다.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궁극적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부터 타인을, 나아가 우주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Q.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들이 있는데 이 형상들이 각각 모여 전하고자 하는 메인 주제를 뒷받침하는 소재 역할을 하는지.
A. 우선 공통적으로 등장시켜는 것에는 ‘중절모’가 있다. 이것은 고고학자를 상징하고자 했다. 화면 전체를 무대로 점점이 부유한다거나 붉은 색 꽃과 어울려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청색의 모자다. 다음으로 ‘심산유곡’이 있다. 지친 현대인이 머물고 싶은 안식처이자 언젠가는 꼭 가게 될 것 같은 유토피아이자 이상향을 그려보고자 했다. ‘동물형상’도 있는데 동식물 또는 음양의 조화로움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밖에도 ‘복숭아꽃’이 있다. 도원경(桃源境)의 상징이다. 영험한 동물을 만난 고고학자의 안내로 우리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다완’도 빼놓지 않는데 다완과 찻주전자는 출토 유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무한대 도형’도 있는데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기호는 19세기에 나온 뫼비우스의 띠와 함께 영원함을 상징하고 있다. 한다. 모든 시간의 터널을 깊게 관통하는 것은 결국 ‘행복의 에너지’이기를 바라면서 작품에 담아내고 있다.

Q. 이 같은 작품 경향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부탁한다면.
A. 현대적 시각에서 본 이상세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내가 공을 들이고 있는 작품의 중심 주제는 바로 이상세계다. 조선 전기 화가 안견의 작품으로 유명한 ‘몽유도원도’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세계의 대표적 모습이다. ‘몽유도원도’와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 등 이상세계를 표현한 그림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 이 시대에 맞는 ‘21세기형 이데아’를 꾸며보는 것이 목표다.

Q. 현재 후학 양성에 몰두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설명을 해주신다면.
A. 지난 2004년부터 강원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학생들에게 인생길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을 통해 인생길을 걸어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미술을 잘하려면 무엇이든 사물을 많이 보고, 세상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틈이 나는 대로 많이 그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미술 능력이 발전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Q.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 이 자리를 통해 밝혀 달라.
A. 교수 임용 이전부터 나를 돕는 후원자들과 ‘임근우예술동아리’를 조직했다. 더불어 즐기는 문화 활동을 통해 예술의 대중화를 이뤄내겠다는 게 나의 포부다. 사회 안에서 문화 향유층을 넓히고 이를 통해 예술을 맛본 사람들을 제2의 예술 생산자로 발전시키고 싶다. 나의 인생 좌우명은 물리 공식 ‘F=ma(질량에 가속도를 붙이면 힘이 되는 공식)’이다. 이것을 좌우명으로 정한 것은 요령을 피우지 않는 우직한 삶을 통해 정도를 걷고 싶어서다. 이것이 내 인생의 꿈이다.

Q. 독자들이 임 화백의 재테크 방법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소개를 해주신다면.

Q. 화가들만의 특별한 재테크 비법은 있는지, 만일 있다면 말씀해 달라.
  
Q.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A. 다시 태어나도 화폭 앞에 서고 싶다. 그만큼 미술은 삶의 위대한 신앙으로 생각한다. 미술이 존재하기에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생각하고 있다. 한 번은 그림을 통해 즐거운 삶을 살 방법은 없는지 생각해 봤다. 결론은 미술의 존재 자체가 행복충전소이자 문화충전소라는 것이다.
이를 모토로 앞으로도 계속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특히 중국과 미국 등 해외에서 나만의 작품 세계를 펼치려고 하고 있다. 행정적으로 맡은 업무가 많지만 결코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생각이다. 미술을 통해 더불어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꿈을 계속 실현해 나갈 생각이다.

======================= 프로필 =====================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동 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31회)
서울, 춘천, 대구, 바르셀로나, 베이징, 상하이, 도쿄, 오사카, 고베, LA 등
▲단체전(국내외 아트페어부스개인전 등 1000여 회 초대출품)
MANIF16!2010(예술의전당, 서울), KIAF 국제아트페어(COEX.서울), 2002 FIFA 월드컵 공식문화행사 메인설치작품 제작(월드컵 상암경기장, 서울), DOS CARAS(Museo del Ferrocarril , Madrid Spain)
▲수상
 94 MBC 미술대전 ‘대상’ 수상(1994년), 제1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수상(1995년), 미술세계작가상 수상(2006년), MANIF 우수작가상 수상(2010년)
▲공공기관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과천),미술은행,한국문예진흥원(서울),성곡미술관(서울), Museo del Ferrocarril(Madrid. Spain),바르셀로나 국제현대미술센타(Barcelona. Spain), MBC문화방송국(서울) 경기문화재단(수원),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서울), 아랍에미레이트왕실, 노동부장관실 등
▲현재
강원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 (사)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일본 CAF.N미술협회 회원, 서울경기고고학회 회원, ORIGIN 회화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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