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22:09 (토)
작가 이재상 “자연은 작업 모티브, 대상은 산”
작가 이재상 “자연은 작업 모티브, 대상은 산”
  • 월간리치
  • 승인 2011.10.09 16:44
  • 호수 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ountain - Flower, Renaissance(산 - 꽃으로 피다)

나에게 여행이라 함은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부터의 탈출이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습관 되어 진 많은 것들의 생각과 행동으로 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 습관은 삶에서 얻은 다양한 지식을 통하여 작업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너리즘과 지식의 단편적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래서 종종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자연을 만나 교감하며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자아를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발견은 자연이란 자신을 알기위해 정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 투사하여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의 이론에 부합하며, 나의 작업에 있어서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재현이 아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하여 얻은 영감과 감흥을 시인이 시어를 걸러내듯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중된 나의 시각적인 대상은 ‘산’ 이다
산이라는 자연 형태에서 모티브를 빌려 관조적인 단순한 절제미를 통해 새로운 표현 방법을 얻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대상을 통하여 나의 사유적 공간을 말하고자 한다.
산은 나의 영혼을 정화하고 치유하며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정화는 작업에 있어 산이라는 대상이 사실과 추상 또는 이성과 감성 사이의 상상을 넘나들며 원형의 형태 속에 구현된 산의 이미지가 자연계의 모든 것을 포용 하려는 듯 겹겹이 둘러 쳐지며 작은 꽃송이로 피어난다. 이것은 심미적인 관점에 의해 표출되는 미적인 가치로서 일반적 자연미와는 다른 관조를 통한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 하였으며 이러한 인위적 소재의 구성은 은연중 새로운 형식의 조형적인 질서를 통하여 미적 쾌감을 일으킨다. 또한 무수히 선을 긋는 반복적인 행위 속에 드러나는 마티에르와 색채는 작품의 감성적 동요와 호기심을 자극하고, 많은 시간 속 노동의 결과물인 마티에르는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과 신비함을 찬미하며 밝은 모노톤적 색채가 영혼의 정화와 치유로서 나타나고 은은히 감추어지며 드러나는 전체적 형상이 아르누보적 상상의 꽃으로 재탄생 한다.
나에게 있어 자연은 작업의 모티브이며, 미적 직관을 통해 얻어진 작품은 산이라는 대상이 꽃으로 피어나는 상상을 통하여 얻어진 정신적 반영물로서 현대적이고 관조적이며 절제된 미학적 순수미의 한 부분을 이야기 한다.

                                                     
작업이 여행이자 위안
如-바람의 뜰

 

어느 한적한 시골 어귀에 들어선다. 예고 없이 찾아든 이 조그마한 마을 입구에는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따라 몇몇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있고 그 가지 위엔 이름 모를 새들이 사철 지저귄다. 수명을 가늠할 수 없는 금빛 소나무와 여기저기 널려있는 소박한 들꽃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자리한 동네에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동물들, 이 모든 것이 오랜 세월 한 마을의 일상을 이루어 온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을까. 생각의 갈래를 따라 가벼운 명상과 교감이 흐르고, 텅 빈 의자에 앉아 사색해 본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돌아와야  하는 내 작업실. 번화가에 위치한 작업실에는 숱한 행인들과 상인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과 경적 소리로 가득 차고 창밖으론 이미 거대한 전모를 드러낸 신축 아파트가 하늘을 반쯤 메운다. 답답하다. 정보화니 기계화니 등등 하는 말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이성과 문명의 포로가 되어버린 인간의 삶이 불연 듯이 내 자신의 잔상과 교차함을 느끼며 한적한 오솔길이나 숲 속의 지저귐, 솟대의 염원을 앗아간 냉엄한 경제논리가 새삼 폐부를 찌른다.

나는.......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 좋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좋다.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이 갑갑한 일상을 떠나 여행을 하거나 자연을 찾아 위안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한다. 작업이 나의 즐거움이다. 수년간 자연이라는 소재를 통해 캔버스에 수 없이 표현해 온 소박한 이야기도 기실은 이러한 내 욕구의 현현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각박해져만 가는 문명세계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숨결과 따뜻한 정서를 실어 주는 힘이 있어 좋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꿈과 상상력, 살아있는 인간미를 만난다. 어느 덧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동네 어귀의  풍물들이 스스로 간직 해 온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앞으로도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이재상 평론, 박옥생(미술평론가,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바람의 고향을 찾아서
작가 스스로 피어나는 자연에 관하여…

 

이재상의 근작들은 피어나는 산들로 가득하다. 하늘에서 본 산등성이는 풍성하게 만개한 꽃잎의 향연으로 춤을 춘다. 작가에게 있어 산은 풍부한 표정을 담은 자연을 대표하며,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시간의 궤적들을 수렴한다. 그리고 그리움으로부터 즐거움에 이르는 감정의 층위들이 쌓여있는 축적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화가의 산은 객체로써의 산이 아니라, 감정이 이입되고 은유화된 영산(靈山)이고 신화의 산인 것이다.

스스로 피어난 자연

그의 작품들은 산이 숨을 쉬듯 그 형태의 변환이 다양하고 흥미롭다. 전작(前作)에서 보여주는 <如-바람의 뜰>은 등고선으로 그 산의 표식만을 던지고 있으며, 근작에 이르러 다시 산은 꽃잎과 같은 형태로 되살아난다. 그의 형상은 분명코 <피어나다>라고 해야 옳다.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바라보는 산은 곽희(郭熙)가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말해주는 다각도의 관찰체험과 닮았다. 고원, 심원, 평원의 원(遠)은 정신적인 시각처리 방식이라 하겠는데, 보이지 않는 산천의 구석구석을 음미하고 관찰하고 재조합하는 것이다. 또한 익히 우리에게 익숙한 고구려 고분벽화와 같은 역동하는 산의 출현이나 그가 곳곳에 숨겨둔 의자, 집, 오리, 나무, 솟대와 같은 소재들은 바람의 나라를 꿈꾸는 아득한 기원이나 원형을 상기시킨다. 사실, 그의 작품에는 불교의 자타카(Jataka, 본생담)에서 드러나는, 같은 화면에 시간성을 달리하는 내용들이 결합되는 동도이시(同圖異視)와 같은 조형성이 보이기도 한다. 고대와 현대가 둥근 화면에 뒤섞이고 정면과 부감이 만나는 시선처리가 그것인데, 그가 이러한 고전의 영향을 받고 있든 아니든 이재상의 화면은 동양화론의 미적 대상물에 접근해 가는 태도와 원시적이고 정신적인 조형어법과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양화에서 느끼는, 마음으로 풍경을 감상하고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고 음미하는 것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의 꽃으로 형상화된 피어나는 산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현대 문명의 망각을 비판하면서 제기하는 퓌지스(Physis)에 관한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이데거에게 퓌지스는 자연이며 자연의 본성은 “스스로 피어남(Aus-sich-her-aufgehen)”이라 말하고 있다. 스스로 피어나는 자연, 사실 이는 노자가 말하는 작위하지 않은 작위, 스스로 그러한 것,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피어남은 노장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도(道)의 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상의 화면은 자연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한 작가의 조형이 묘하게도 노장사상의 도(道)의 모습을 정확하게 함의하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기적 통일성 융합의 결과는?

이재상의 작품에는 아이와 같은 순수함, 천진난만한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의 문이 열려있다. 오염되지 않은 개별 사물들의 맛과 향기는 뚜렷하게 자신의 인상과 표정을 지닌다. 이들은 몇 개의 선이 모여 나무가 되고 산이 되고 집이 된다. 이 명료한 단순성은 작가가 자연에 흠뻑 매료된 순간의 즐거움을 함축하거나 분출하거나, 그가 집요하게 그리워하고 있는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으로의 되돌아감을 구체화 시킨다. 단순성이야 말로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억으로의 해방과 이미지의 시원으로 끌고 가는 신비한 언어이다. 단순성은 금지된 언어이며 신(神)의 언어라 하겠다. 기억이 현실이 상상이, 단순화의 과정을 거치면 신화가 되고 그리움이 되고 순수한 세계의 표상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맑고 깨끗한 어느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계로의 전환이다. 노자도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단순성을 말하고 있다. 큰 공교로운 것은 가장 졸한 것이라는 이 말은, 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아이의 그림과 같은 단순함과 어눌함에 스스로 그러한 도(道)의 이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재상의 예술세계는 자연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순수함 그리고 그 속에서의 감동을 드러내기 위한 내용과 기법이 유기적인 통일성으로 융합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즉흥적으로 모방하는 단순한 경험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흙 사이로 겹겹이 쌓여진 지층의 말하지 못한 시간의 사연들과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생의 기쁨으로 가득한 산의 분위기를 작가는 보고 걷고 밟고 만지며, 자연이 담고 있는 삶의 숨결을 오래도록 체득하고 음미한 결과인 것이다.

이면에 배인 그림의 모습은 ‘이것’

이러한 그의 자연은 기원의 기원, 시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如-바람의 뜰> 시리즈에서는 조형은 함축적이고 상징적이나 내용은 시적이고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하늘과 바람과 구름이 불어오고 흘러가는 그 뜰의 풍경! 그가 그려오던 솟대가 가진 간결한 형상 속에는, 인간의 염원을 하늘로 승천시키는 기원(祈願)과 제의(祭儀)의 삶과 신화가 꿈을 꾸고 있다. 장승과 같은 문화적 표상에는 흥건하게 묻어나는 고향에 관한 그리움과 떠나옴에 관한 서러움이 교차되고 있다. 말을 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쥬신(숙신, 동이)이 그들의 마음이 머물고 안락한 꿈을 드리울, 이상의 땅을 찾기 위한 멀고도 고된 여행을 떠나 온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재상의 조형에는 이러한 민족의 오래된 꿈이 서려있는 지도 모른다. 이는 고향을 그리는 노스텔지아의 꿈이다.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서서히 번져 나오는 고향에로의 향수, 그리고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인간애가 살아 있는 곳. 그 곳에 관한 꿈이며 희구이다.
사실, 그의 천진하고 즐거운 조형들을 따라가다 보면 빈 의자의 쓸쓸함처럼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연에서 도시로 지나 온 시간들의 서늘한 뒷모습이 다가온다. 마치 나의 고향을 묻는 것처럼. 빈 방앗간이 있고 작은 냇물이 흐르는 그 곳이 꿈결인 듯, 때가 되면 낡은 버스를 타고 꽃 대궐 어느 한 자락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향의 아픔이 서려있다. 그것은 아이의 표정을 한 어린 꽃처럼, 소소하고 덤덤한 작은 몸짓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근작에서 다시 꽃으로 피어나는 원으로의 회귀는 완전한 삶과 조형에로의 확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리워하는 고향의 구체화된 완성이나 확장된 이상향과 같은 세계의 내용에 중심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들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담담히 참아내고 살아가는 소박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꿈을 완성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피어나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나 순수, 동심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화가는 그의 바람에게 다시 묻고 있다. 너의 고향은 어디냐고 말이다. 


박정수(갤러리바이올렛 관장, 미술평론가)
뒤팽의 고원에는 평등을 위한 바람의 뜰이 있다
우리네 삶 녹아든 확장된 의미는 ‘진보’

작은 점들이 모여 원을 이루고, 원 안팎에는 또 다른 원이 드려진다. 평면에 입체를 의미하는 등고선들이다. 등고선은 300여년 전 프랑스의 뒤팽 트리얼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지형도에서 땅의 모양과 높고 낮음을 도면에 나타내는 선이다. 뒤팽이라는 사람의 등고선이 화가 이재상에 와서는 바람이 불고, 활기 넘치는 평등의 땅이 되었다. 지형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것이나 낮은 것이나 같다는 의미로 작용한다. 산의 모양새를 모아 꽃의 형상으로 재현하던 <如-산으로 피어나다>와 <如-꽃으로 피다>, 바람의 모양새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새로운 조형구조를 형성하던 <如-바람으로 피다>에서 나타나던 일련의 형식에서 좀 더 확장된 의미의 모습들이다. 
세필에 물감을 묻혀 겹겹이 쌓아올리는 밑칠에서 시작된 작품구조는 그린다는 것보다는 쌓는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쌓고 칠하기를 반복하면서 땅이 만들어지고 산이 높아진다. 나무가 심기고 바람이 불면서 무한의 생명이 탄생한다. 작품속의 자동차를 따르다 보면 평등한 세상의 여행자가 된다. 평지를 가다가 울퉁불퉁 들판을 달리고, 바람을 좇아가다 보면 어느 사이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환상이거나 꿈속의 이상향이 아니라 작품의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의 낙원이다. 사슴은 새를 업고 다닌다. 새는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땅위를 걷는다. 새가 걷고 들짐승이 날아다니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날짐승이나 들짐승이나 아주 평등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如-바람의 뜰>시리즈는 이전의 작품에서 진화된 바람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바람을 그리고 싶어 한다. 솜털이 살갗을 간질이고 나뭇잎이 흔들릴 때 바람이 분다고 볼 수 있다. 잡히지도 보이지도 모양도 없는 바람은 물과 같이 담는 용기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 모양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 자체가 없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모든 모양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람을 그린다. 모든 것에 평등하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바람과 등고선을 따라 부는 바람에는 우리의 삶이 들어 있다.
작품안의 모든 사물은 조용하기 그지없다. 자동차의 소음도,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몹시 활발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나무와 집들 또한 쉬고 있다. 높은 산이나 낮은 땅이나 묵묵한 땅이면 족하다. 하늘을 나는 날짐승이나 땅을 걷는 들짐승이나 구분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도 없다. 예술가로서 스스로 자연에 순응하면서 하나로 이해하고자 하는 <如>시리즈의 진보된 입장을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이재상 평론, 김동명(아트피플대표)
오염되지 않은 내면의 평화와 자유로의 여행
오래 머물고 싶고, 떠나기 싫은 까닭은…
 
필자가 본 이재상은 부지런하다. 큰 덩치에 순한 눈망울이 그의 그림과 닮은 점이 많다. 작가는 예의바르다. 한·중아트페어에서 작가를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항상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고 선배를 챙기며 잔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는다. 선배들 앞에 나서기를 절제하고 아우(弟)의 모습으로 일관한다. 이런 작가로서 성실한 모습과 좋은 작품으로 한·중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기념으로 아트피플 AP갤러리에서 대상 수상기념 개인전을 갖는데 여러 가지 변화가 엿보이는 이번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행복이라는 것이 마음에 달려있음을 알지만 늘 마음을 평안히 하고 요동침을 막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의 말 한마디, 너무나 바쁘게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평안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럴 때 이재상의 그림 속에 들어가 그가 만들어놓은 의자에 앉아 잠깐 쉬어가라고 권하고 싶다. 이재상의 그림 속에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평화가 있다. 고요하고 잔잔한 생명이 깃들어진 동화 속으로 들어온 착각을 일으키며 보는 이의 잊혀졌던 동심을 자극한다. 사슴, 나무, 새, 꽃 등의 아기자기한 소재들을 그려낸 그의 터치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아무나 생각하는 가벼울 수 있는 소재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는 버스는 대부분 빨간색으로 표현했는데 사실 버스는 빨간색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 모두들 한 번씩은 빨간색 버스를 상상해 본 기억이 있다. 무언가 선물을 잔뜩 싣고 나에게만 올 것 같은 이 빨간색 버스, 작가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 버스를 타고 작가가 안내하는 데로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다 조우하게 되는 나무와 새들과 꽃들은 이재상이 안내하는 세상의 휴식과 평화로 인도한다.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조그맣게 등장하는 의자들 그것은 마치 휴식을 취하기도 어려운 우리네 바쁘고 팍팍한 삶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래도 쉬어가라고 손짓하고
유독 강한 색으로 표현한 꽃들은 현란한 향기로 관객의 코끝을 자극한다. 비교적 큰 형태로 표현한 사슴은 풍요의 상징이리라. 특별한 표정을 짓지 않고 있으며 그저 여유로운 자태로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수확으로 가득한 곳간을 바라보는 맘 좋은 대감님 같은 넉넉함이 배어 나온다.
이재상의 이 동화 같은 그림은 하늘을 나는 사랑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사랑새는 늘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하트의 형태로 사랑의 전령사같이 등장한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앉아서 사랑새가 가져다 줄 선물을 잔뜩 기대하며 올려다본다. 순환하는 이 빨간 버스는 언제든 원하는 곳에서 내릴 수 있으며 내리면 항상 그 곳에는 꽃이나 새, 조그만 정자 또는 사슴이 기다리고 있고 호숫가에 있는 나무도 있다. 그 나무 곁에 오래 머물다가 무임승차를 해도 환영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재상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찾게 해준다.
그의 최근작은 겹겹이 정성을 담아 수고로 쌓아 만들어진 바탕의 질감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단순한 형태와 명료한 색상을 선택하여 자칫 고루해질 수 있었던 그림이 바탕의 섬세한 질감으로 생생한 숨결을 되살려 냈다. 질감에 판화처리 기법을 사용하여 탁월한 효과를 본 것이다. 점과 선을 주로 썼던 전작과는 다르게 두터운 질감으로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과감하게 바탕의 색과 이미지들을 제거하려 노력했다. 한층 과감해지고 시원스러워진 이재상의 근작을 통해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란 질서를 무시하고 난잡하게 굴며 규칙을 무너뜨려버리는 ‘일탈’의 개념이 아닌 한 차원 더 높은 의미의 ‘포용’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오래 머물다보면 한적한 곳으로 휴가를 다녀 온 것처럼 생각이 정리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평화와 휴식의 의미를 두었으되 작가가 만들어낸 순수함의 결정체들은 쉽게 범접하지 못하는 손에 닿지 못하는 곳에 두고자 했으니 혹은 깊은 산속을 헤매지 않고는 쉬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두어 함부로 정복하거나 그 형태의 변형을 허용하지 않는다. 고요한 평화로움 속에 성찰을 주는 오염되지 않은 여행. 아무도 찾지 못한 나만이 발견한 신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은 설레는 떨림이 있다. 그래서 일까 그가 만들어낸 이상의 공간은 혼자만 간직하고 싶게 만드는 소유욕과 탐닉을 일으킨다. 이것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곳 이재상의 그림 속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게 하며 이내 떠나기 싫은 아쉬움으로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