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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의 재조명 -원석 탁본 전시에 붙여-
광개토대왕비의 재조명 -원석 탁본 전시에 붙여-
  • 월간리치
  • 승인 2011.12.08 16:22
  • 호수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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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비인가, 조작되었는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11월 18일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의 부대행사로서 ‘광개토왕비와 탁본’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은 국내 최초로 소개되고 있는 광개토왕비 원석탁본(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미즈타니 본)과 관련된 것으로 5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광개토왕비 이해에 도움을 줬다는 평을 얻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연합통신의 김태식 기자는 광개토왕비에서 ’陵(능)‘과 ’墓(묘)‘라는 글자가 구별돼 사용되고 있는 점에 착안해 이 비가 고구려 전체 왕릉 묘역 수호를 규정한 법령비라고 주장했다.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는 고구려가 실제로는 391년에 요동을 공격하기 시작해 402년에 완전 장악했는데 광개토왕비에서는 사실과 달리 의도적으로 395년에 요동을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광개토왕비는 19세기말 일본의 조선침략과 함께 일본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됐음을 다시 환기시켰다. 그 근거로서 쌍구가묵본은 바로 일본이 비문 내용을 조작한 근거이며 이를 통해 “신라에 왜가 가득하였다”는 내용 등이 조작됐다고 한다.
부산시립박물관 백승옥 학예연구실장은 비석이 훼손되고 있는 상황에서 초기 사진과 탁본 자료가 중요하며 탁본 가운데 원석탁본이 절대적임을 환기했다.
지금까지 탁본 비교의 바탕이 되어왔던 글자 모양뿐만 아니라 탁본 뒷면의 종이 모습까지도 고려해 탁본의 연대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수곡본(水谷本)은 원석탁본으로 1882년에서 1889년 사이에 제작됐다고 결론지었다.
손환일 소장(서화문화연구소)은 광개토왕비 탁본을 검토한 뒤 광개토왕비의 서체는 당시 유행하던 중국의 예서와는 달리 모든 서체를 갖춘 종합서체의 집합체로 북방 서사(書寫) 문화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고광의 연구위원(동북아연구재단)은 이것이 바로 ‘광개토태왕비체’라고 명명하고 이것이 이 후 고구려 서체의 표준이 됐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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