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16:53 (금)
LG家 음·양택  명당과 기업의 성장 과정
LG家 음·양택  명당과 기업의 성장 과정
  • 이종천 실용풍수학회 회장
  • 승인 2024.02.0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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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순위는 명당의 역량과 비례한다

 

한국 엑스오(CX0) 연구소 분석 결과 올해 1월 초 기준 국내 상장기업(우선주 제외) 2607사(社)의 시가 총액 2503조 원 중 삼성그룹은 718조9065억 원으로 코스피 시가 총액의 31.6%, LG그룹이 LG에너지솔루션의 주가 상승 덕분에 203조9065억 원으로서 SK를 제치고 2위로 올랐다(3위 SK는 123조1635억 원). ‘솥 바위 전설’이 현재에도 진행 중인 것이다. 한국경제가 세계 10위권에 올라 ‘한강의 기적’이라지만 ‘솥 바위 전설’ 주인공들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며 ‘재계 순위는 명당의 역량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LG가(家)의 음. 양택 명당과 기업의 성장 과정·후손들의 활약상을 조명해 본다.

동업으로 창업하고 아름답게 청산하고

이병철과 조홍제, 구인회와 허정구는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삼성과 금성(LG)은 자신들이 모자란 자금력을 상대방으로부터 충족해 동업으로 기업을 창업하고 발전시켜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국부가 됐는데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기업을 분리하는 과정에선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 조홍제(1906~1984)는 친구(이병각)의 동생 이병철(1910~1987)과 13년간 동업했다. LG와 GS는 사돈간으로서 55년간 동업했다. 전자는 이병철에게 절대 유리하게 기업분할을 했다면 후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과 분배’로 칭송받고 있다. 현재의 LG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구인회(1907~1969)를 도와 ‘럭키금성’을 공동 창립하고 GS 그룹의 시조가 된 독립운동가 허만정(許萬正 : 1987~1952)이 있다. 두 가문에 대해 알아본다.


LG와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은 판박이

LG는 생활필수품 중심의 경공업으로 시작해 전기, 전자, 중화학공업, 가전, 반도체, 이차전지(LG엔솔) 등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모델이다.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는 철종 때 문과에 급제해 고종황제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연하는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을 지냈는데 학문이 깊어 선비, 유림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한·일 합방 후 낙향해 은거했으며 사후 방어산 자락의 회룡고조형 명당(발복이 빠름)에 묻혔다. 주산은 균형이 잘 잡히고 간담이 서늘하도록 높이 솟은 청격의 문필봉으로서 이 묘의 영향으로 기라성같은 후손이 많이 태어나 LG그룹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구인회(具仁會: 1907~69)는 선조들의 영향으로 유교적 가풍을 받고 태어나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다. 1920년 지수면 승산리 같은 마을 허만식의 딸 허을수와 결혼해 슬하에 6남 4녀를 두었다. 그는 26년 중앙고보를 졸업, 귀향한 후 지수협동조합의 이사로서 사업상 첫출발을 했다. 후일 사업을 시작할 때 사돈 허만식 일가가 동업으로 LG의 창업과 경영에 참여했다. 


구인회, 사돈 허만정과 동업으로 화장품 생산

1931년 구인회는 동생 구철회와 진주 중앙시장에서 ‘구인상회’라는 포목상을 운영해 크게 번창했다. 44년에는 트럭 30대로 운수업을 시작하다가 45년에는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는데, 이는 미군정청에서 허가받은 국내 무역업 1호 업체다.

이 무렵 사돈 허만정이 일본 유학에서 막 돌아온 아들 준구(후일 GS건설 명예 회장)를 대동하고 찾아와서 “나도 사돈 사업에 출자할 테니 자식놈을 밑에 두고 사람 좀 만들어 주소”라며 동업 제의를 했다. 그는 화장품 판매 대리만 하다가 처가 쪽 자본을 바탕으로 부산 서대신동에서 ‘조선흥업사’를 설립해 화장품 생산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는데 첫 제품으로 저 유명한 럭키 크림(동동구르무)을 출시했다.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화장품 담는 용기를 만들면서 합성수지제품에 대한 노하우가 축적되자 칫솔, 빗, 바가지, 물통 등 생활용품을 만들고 본격적인 제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고, 1952년 머리빗과 비누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빗만 쓰던 사람들은 합성수지 빗에 열광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 빗을 보고 감격했다고 한다. 1955년 부산 공장에서 국내 최초의 럭키 치약을 출시한 다음 해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장에서 치약 10만 개를 무료 증정하는 이벤트를 열었고, 출시 3년 만에 당시 시장을 주름잡던 미국산 치약을 물리치고 국내 시장을 석권했지만, 폭리를 취하지 않았다 .


국산 라디오 출시와 금성사 설립
 
1950년대 후반 해외 원조에 의한 전후 복구 사업으로 전기 통신인프라가 구축됐다. 연암(連庵)은 민간 방송국이 출현하자 라디오에 관심을 뒀다. 당시 라디오 수요는 늘고 있었지만, 외제뿐이었다. 1959년 한국 최초의 전자공업회사인 금성사를 설립하고, 11월 국산 라디오 1호를 출시했다. 국민 소득향상에 따라 TV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면서 오늘날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과 분배

2005년 LG와 GS는 55년간의 동업 관계를 청산, 기업을 분리했다. 두 집안은 반세기가 넘도록 동업하면서 한 번도 갈등이 없었다. 창업 당시의 지분 65%대 35% 비율을 정확히 지켰다고 하며 좋은 기업을 차지하려고 다투지도 않았는데, 유교적 상도(商道)를 근본으로 기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LG가의 음·양택 명당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천석꾼 이상의 부자 16명이 쌀 3만8000석을 수확했다는 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히는 명당 마을이다. 지수초등학교는 이병철, 구인회, 조홍제, 허만정 등이 다녔다. 이 학교 출신 기업인들이 운영하는 회사 30여 곳이 증시에 상장됐을 정도로 유명한데 그 이유를 풍수지리이론으로 설명하기엔 지면이 좁아 다음 호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구덕조 묘의 명당 발복

LG 창업주 구인회의 증조부 구덕조 묘는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산 70의 일자(一字) 능선으로 된 야트막한 산 정상(113.7m)의 용맥 끝부분에서 지수 목과 진양 벌판을 바라보며 부부 쌍분으로 안장돼 있다. 특이한 점은 청룡. 백호가 겹겹이 감싸 주기는 하지만, 혈장보다 낮거나 멀리에 있어 ‘명당은 장풍이 잘 되는 낮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풍수 이론을 무색하게 만드는데, 들판에서 퍼져오는 평지 바람은 두려울 게 아니지만 초보자의 눈엔 ‘그저 그런 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밝은 눈으로 보면 구덕조 묘야말로 득수 형 명당의 표본이다.

그 이유는 첫째, 남강 물과 마성 펌프장 뒤의 바위산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 된 엄청난 기운과 남강물과 반성 천이 합수하면서 발생하는 기운 및 진양 벌과 ‘마성들’에서 발생하는 응기(應氣)를 오롯이 받아먹는 지세로서 필자의 부족한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다.


논개와 최경회 장군 시신을 건진 지수 목은 명당지세 진주 시내에서 남강물을 따라 약 20리를 내려가면 사봉면 마성리 지수 목이 있다. 이곳은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해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자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최경회 장군과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시신을 수습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 장병 7000명과 성안에 있던 양민 2만 명이 왜군 10만 명과 맞서 싸우다 전멸하자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분장한 후 왜군들이 촉석루에서 전승 잔치를 벌일 때 접근,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케를 껴안고 남강물에 투신해 순절했다. 열흘 후 의병들이 지수 목에 떠내려온 논개와 최 장군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논개는 얼마나 한이 서렸는지 그때까지 왜장 껴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한다.

의병들은 낮에는 숨고 밤에 이동해 3일 만에 논개 부친(주달무) 고향인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에 도착해 이곳 양지바른 곳에 논개 부부를 안장했는데, 산신령이 보살폈는지 대 명당 혈심에 안장됐다.


구덕조 묘는 왜 대 명당인가?
구덕조 묘가 왜 대 명당인지에 대해 필자는 정통 풍수 이론으로 해석할 의무가 있다. 강물이 합수(合水)하는 곳, 산이 강물을 역수 하는 곳에 부혈(富穴) 명당이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기(氣)는 땅속으로 흐르는 음기와 산(음)과 강물(양)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음양 교구의 기운과 하늘에서 내려와 산천초목에 반사 돼오는 양기(天氣 : 應氣)로 구분한다. 기가 모여서 응집된 곳이 명당 혈(穴)이고, ‘득수 형 명당’에서 큰 부자가 태어난다. 남강은 경남 함양의 지리산, 백운산, 남덕유산에서 흘러온 청정수가 산청을 지나 진양호에서 모인 후 진주 시내 중심부와 진양 벌을 적시며 지수 목에 이르는데, 약 600~700m 거리에 있는 구덕조 묘에선 들판 너머의 안산(109m)에 가려져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 강 쪽에서 보면 깎아지른 석산이고 마을 쪽은 토산이다. 강물은 석산과 충돌하며 엄청난 기운이 발생하고, 이 기운을 구덕조 묘가 흡수하기 때문에 부혈(富穴) 명당이 되는 것이다.

또 합수처(合水處)에 대 명당이 있다. 마성들과 경남 체육고교 사이를 흘러온 반성 천이 펌프장 앞의 깎아지른 바위산과 부딪히며 남강물을 치받는 형국으로 만나면서(二道上合) 음양(陰陽)이 교구하며 생기(生氣)를 증폭하고 있다. 특히 109m의 바위산이 남강물을 역수해 물길을 90도로 바꾸고, 지수면 용봉리를 U자로 안고 돌아 나가면서 기(氣)를 보호하며 천기(天氣)가 산천초목에 부딪히고 반사되어 오는 기운인 응기(應氣)도 오롯이 구덕조 묘가 받아먹는 형세이다.

 마성들 좋은 터를 명당이라고 하지만, 풍수에서는 집이나 묘 앞에 있는 평탄한 땅도 명당이 라 한다. 선사들은 “혈(穴)이 맺히기 위해서는 명당이 기울지 않고 주위의 산이 명당을 둥글게 감싸면서 바람을 막아 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곳 마성들은 넓고 평탄하며 사방이 산으로 감싸있는 등 명당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 구덕조 묘가 왜 재물에 이로운 명당인지를 입증하고 있이종천 실용풍수 학회 회장
구연호 묘

연암 구인회의 조부 구연호 묘는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 산 36에 있다. 태조산 격인 지리산 영신봉에서 출원한 낙남정맥이 삼신봉을 거쳐 창원의 무학산, 함안의 여항산(743m), 미산령(661m), 오봉산(524m), 괘방산(456m)을 지나 방어산(530m)으로 연결되는 용맥(龍脈)이 회룡고조형으로 입혈(入穴) 했다. 주산은 좌우 균형이 잘 맞고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높게 솟아 개면 한 청격의 문필봉인데, 혈장까지 뚜렷한 용맥이 이어지지 않고, 이재봉 묘처럼 경사가 급해 술사들은 생기맥(生氣脈)이 오지 못하는 무맥지(無脈地)라고 주장하나, 풍수의 밝은 눈으로 보면 구연호 묘로 오는 용맥이 섬룡 입수로 입혈 하다가 혈장 바로 위에서 낙맥(落脈)해 결혈한 명당임을 알 수 있다. 선사들이 “청격(淸格)의 목형산(木型山)은 문장(文章) 귀현(貴顯) 하여 글 잘하는 학자가 태어난다”고 했는데 이 묘의 후손들은 자손 번창하고 머리가 좋아 일류대학을 나오거나 미국 유명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LG그룹의 경영에 참여하여 회사 발전에 매진하는 등 다른 기업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구태회(1923~)
연암 구인회의 아우, 지수면 승산리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 58년 진양에서 제4대, 67년 7대, 71년 8대, 75년 9대, 79년 10대 등 6선 국회의원. 

구평회(1926년 6월 30일~2012년 10월 20일)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하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 법학 박사학위(1993) 취득했다. 호남정유 사장, 여수 에너지, 럭키금성상사, 럭키금성 경제연구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2년 금탑산업훈장, 9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구두회(1928년 10월 12일~2011년 10월 21일)
진주고와 고려대를 졸업하고, 뉴욕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 취득. 범한 화재보험, 희성산업. 한국콘티날카본 사장, 금성반도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구자경(1924~2019년 12월 14일)
연암의 장남. 진주 사범을 나와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 50년 락희화학 공업사(현 LG) 이사, 70년부터 90년까지 럭키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취임 당시 260억 원이었던 그룹 매출을 30조 원 규모로 키웠다. 95년 럭키그룹 명칭을 LG 그룹으로 바꾸면서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은퇴했다. 

구자학(1930년 7월 15일~2022년 5월 12일)
50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지내다가 59년 소령으로 예편한 후 60년 미 디파이언스대를 졸업하고 제일제당 이사, 금성사 상무, 호텔신라, 중앙개발 사장, 국제신문 대표이사 사장, LG 반도체 회장, LG 엔지니어링 등 여러 회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철탑산업훈장, 금탑산업훈장을 수상.

구자두(1932년 1월 15일~)
52년 경기고 졸, 연대 3년 중퇴 후 57년 미 워시번대 졸업. 59년 뉴욕 주립대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 귀국해 럭키 화학 관리과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후 럭키금성상사, 신영전기, 금성반도체(주), ㈜ 금성사 사장 등 역임.

구자국(1946년 2월 7일~)
서울고, 미 힐스데일대 전자공학과 졸, 럭키금성상사 미국지사장, LG그룹 미주지역본부 본부장, 회장, LG 상사 부회장 등 역임했다. 

구본무(1945년 2월 10일~2018년 5월 20일) 
구자경 회장의 장남, 연세대 졸업, 클리블랜드 주립대 대학원의 경영학 석사, 수많은 LG 계열사에서 경영인으로 근무한 후 95년 부친의 뒤를 이어 LG 그룹 회장 취임. 2009년, 2012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에서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25인 중 12위 차지했다. 그 외 훌륭한 자손이 많다.

구본능(1949년~) : 구자경 회장의 차남. 고대 경영학 전공, 
구본준(1951년~) : 구자경 회장 3남.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 졸
구본식(1958년~) : 구자경의 4남, 고대, 미국 미시간 대학교 재료공학 졸
구자신(1941년~) : 구자경 회장과 10촌. 고려대 경제학과 졸. 쿠쿠 밥솥으로 동종업계 석권
구자원(1935년~) : 구철회 럭키 화학 사장의 장남이자 LIG 그룹 회장. LIG 그룹은 1999년 LG 그룹에서 분리된 LG화재(현 LIG 손해보험)가 모태다. 지주회사인 LIG를 중심으로 11개 계열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위와 같이 LG그룹 자손들의 활약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다른 기업들의 부러움 대상이었는데, 필자는 방어산 자락의 문필봉 아래에 있는 구연호 묘의 명당 발복으로 똑똑한 후손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판단한다.
 <자료 출처 : 2004년 발간의 진주시 지수 면지(智水 面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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