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曉星 家의 음·양택 명당과 조홍제.....栢山 이종천의 실용풍수 이야기
曉星 家의 음·양택 명당과 조홍제.....栢山 이종천의 실용풍수 이야기
  • 이종천
  • 승인 2024.02.2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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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순위는 명당의 역량과 비례한다

 


   
만우(晩愚) 조홍제(趙洪濟: 1906~1984)는 호암 이병철과 삼성그룹을 공동으로 창업하고 운영해 재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은 분이다. 만우는 삼성그룹 모태인 삼성물산(주)에 호암보다 훨씬 많은 사업자금(8대2)을 투자했고, 제일모직과 제일제당도 설립하고 키운 장본인이었다. 그는 남강 유역 함안의 대지주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오는 등 힘들게 일하지 않더라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으나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호암과 함께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뭉쳐서 삼성을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으나 상대방의 배신으로 쫓겨나다시피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1962년 56세의 늦은 나이에 효성(曉星)을 창업하는 한편 동업자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문제를 고민했지만, 대인배 같은 모습으로 포기하고 사업에 전념해 효성그룹을 10대 재벌로 키워내고 타계했다. 만우의 생애와 음·양택 명당을 조명해 본다.

 

◇ 만우(1906.5.20~1984.1.16)의 생애

만우의 본관은 함안조씨(咸安趙氏)로서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부친 조용돈과 모친 순흥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부농(富農)이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유학, 중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5세에 하정옥과 결혼했다. 19세에 중앙고보에 입학했으나 4학년 2학기 때인 1926년 ‘6.10 만세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중퇴했다. 1928년 일본 호세이대 법정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1935년에 졸업하고 귀국했다. 1942년 군북산업조합을 인수하고 정미업을 운영하다가 1948년 서울에서 사업하던 이병철의 요청으로 사업자금을 투자하고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해 13년간 공동 운영하다가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효성물산을 설립, 10대 재벌로 키운 후 1984년 타계했다.

◇ 친형제처럼 지냈던 재계의 두 거인과 기업의 성장 배경

만우는 호암의 형 이병각과 절친한 친구였다. 호암과 다섯 살 차이로서 동업 이전에도 호형호제하면서 지내던 사이였다. 1948년 호암이 무역업을 시작하면서 많은 자금이 필요 하자 만우에게 먼저 투자를 제의했다. 만우가 당시로는 거금인 800만 원을 투자하고 호암이 200만 원을 보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삼성물산을 창업하고 동업 관계를 맺을 때 사업 주체였던 호암이 사장직, 만우가 부사장직을 맡았다.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국제정세에 밝았던 두 사업 천재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사업이 잘돼 큰돈을 벌게 되자 제일모직, 제일제당 한국타이어 등 기업을 확장해 삼성이 국내 기업의 대표적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1958년 말 호암은 만우를 도쿄로 초대해 동업 청산을 요구했으면서도 지분 정리에 대해선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에 대해 만우는 “동업을 파기하려면 출자지분대로 기업을 나누자”고 주장했지만, 호암은 30%만 주겠다며 맞섰다고 한다. 갈등이 지속하던 중 1962년 동업 관계를 마무리하면서 제일제당은 만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호암이 갖기로 합의했으나 호암은 제일제당을 넘겨준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3년 뒤인 1965년 한국타이어 주식 50%, 안국화재와 천일 증권의 주식을 받는 조건으로 기업 분할을 매듭지었다.

만우는(이하 조 회장이라고 함) 중구 태평로 삼성그룹 건너편에서 회사를 창업하면서 사명을 효성이라고 명명했다. 효성으로 지은 이유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조 회장 탄신 100주년 기념 도서 “늦되고 어리석을지라도”에 의하면 “별이 세 개인 삼성보다 더 밝고 빛나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각오와 동업자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동시에 담겨 있다고 하며 매년 그룹 신입생들의 연수 교육과정에서 ‘삼성에 이병철보다 많이 투자하고 삼성을 키웠다’는 사실을 알리며 자부심을 키웠다. 

만우는 당시 삼성그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고 했지만, 고민 끝에 ‘큰 사람의 마음으로’ 이를 포기하고 사업에 전념했다. 56세 늦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한 조 회장은 울산에서 나일론 공장을 차렸는데 당시 나일론은 미국 듀폰사에서 개발한 획기적인 화학 섬유로서 세계인의 의류와 생필품에 중요한 품목으로 자리 잡게 되자 없어서 못 파는 품목이었다. 자연히 내수 시장과 수출이 호황을 이루어 엄청난 돈을 벌었다. 조 회장은 이 돈으로 한국타이어와 대전 피혁을 인수했다. 1966년에는 한국 나일론을 인수해 동양나일론과 합병했다. 73년에 동양 폴리에스터와 동양 염공을 설립했다. 피혁 원단과 제품 생산을 위해 동양과 대성을 설립했다. 75년에는 한신공영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으로 개명했다. 76년 효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다. 77년 원미섬유, 78년 대성목재를 인수했다. 79년 효성금속과 효성알루미늄을 인수했다. 효성그룹은 70년대 중반부터 10대 재벌로 부상했으니, 제조업을 주 사업으로 운영했던 효성이 창업 약 10년 만에 이룬 놀라운 성과였다. 조 회장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배명중. 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지냈다.

조 회장은 1984년 1월 16일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 조석래에게 효성그룹, 차남 조양래에게 한국타이어, 3남 조웅래에게 대전 피혁을 물려줬다. 만약 당시 호암이 약속대로 만우에게 제일제당을 넘겨줬다면 지금의 CJ그룹은 효성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됐을 것이다. 이렇듯 호암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삼성그룹 계열사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에서 분리된 뒤 오늘날 CJ그룹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조 회장은 호암을 상대로 소송을 포기한 일에 대해 “내가 70년을 살아 온 동안에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결단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회상했다. “때로는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요, 버리지 않는 것이 곧 잃는 것이다” 라는 유훈을 남겼다. (참고자료 : ‘한국경제의 새벽을 밝힌 민족의 별’ 및 효성그룹 신입생 연수프로그램 등)

◇ 조홍제 회장의 탄생과 음·양택 명당

조 회장 생가(양택 명당)

조 회장 생가는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 있는 한옥 주택이다. 규모가 크고 높은 담장으로 조성돼 있어 한눈에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저택임을 알 수 있다. 동촌리는 마을 전체가 평탄한 지세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북쪽이 약간 낮아 양택삼요(陽宅三要 : 배산임수·전저 후고·전착 후관)의 첫째 항목인 ‘배산임수’ 원칙에는 반하지만, 이는 남향집을 선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동촌리 마을의 주택과 균형을 맞춘 배치로 보이는 대신 남쪽 명관리에 있는 백이산(369m)과 구수골에서 내려오는 수(水)를 오롯이 받아먹는 창판수격(倉板水格)이어서 재물에 아주 이로운 형태다. 생가(生家)는 마을 앞 도로변에 대형 주차장을 완비하고 2019년 개방했다고 한다. 출입문은 남문(南門)으로 돼 있다. 관리인은 현장에 없더라도 방문자가 연락만 하면 금세 달려온다. 대문채로 들어가면 사랑채가 나오고, 다시 사랑채를 지나면 넓은 마당 끝자락에 조 회장 생가(안채)가 있다. 다섯 칸 주택은 우측(보는 방향은 좌측) 첫째 칸이 부엌인데, 부엌에서 첫 번째 방이 안방이자 조 회장이 태어난 방으로 보이는데, 유명인들의 생가에서 안방의 명당 여부는 풍수학인들 최대의 관심사다. 조 회장은 과연 명당 터에서 태어났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기감(氣感)해 보니 강력하진 않지만 명당 혈이 감지된다. 생가는 낙남정맥이 함안군의 여항산(743m), 미산령(661m), 오봉산(525m)을 지나 북쪽으로 행룡(行龍)하다가 군북면 명관리에서 좌우 균형이 잘 맞고 개면 한 토형 산을 기봉 했는데, 군계일학(群鷄一鶴) 격(格)이다. 토형 산은 풍수에서 최고로 치는 길산(吉山)이 아니던가. 필자는 차를 타고 명관 마을을 지나가다가 좌측 산의 산세에 위압 당해 급히 하차한 후 마을 주민에게 산 이름을 물어보니 백이산이라고 한다. 백이산은 함안군 군북면의 진산인데, 조 회장은 낙남정맥의 백이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것이다.

조 회장의 선산(음택)

함안조씨 종친들과 풍수학계에서는 “조 회장이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구수골에 있는 증조부(성규) 묘의 명당 발복으로 굴지의 재벌 총수가 됐다”고 하는데, 필자의 판단은 다르다. 즉, 조 회장의 증조부 묘는 청룡과 백호가 중중하고 국세가 좋은 터이지만 수구가 열려있고 백이산이 백호에 가려져 있어 재물에 이로운 기운(응기)을 받지 못하고, 용맥도 주혈이 아닌 방혈로 입혈(入穴)했기 때문에 이 묘의 명당 발복(明堂 發福)만으로 재계 10위권에 오르기엔 역량이 부족하다. 그러나 조 회장 부친 용돈 공의 묘는 주혈 명당 혈에 안장돼 있을 뿐 아니라 역수 하는 청룡이 중중하며 좌향도 재물에 아주 이로운 백이산을 향했다. 아홉 골짜기의 물이 모인다는 구수골의 수(水)를 받아먹는 득수 형 명당으로서 효성이 굴지의 재벌이 되는 데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이렇듯 ‘솥 바위 전설’의 주인공인 이병철, 허인회, 조홍제는 모두 음·양택 명당 기운을 받고 태어나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경쟁자가 되는 등 애증의 갈등을 겪었으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판단력과 피나는 노력 끝에 글로벌기업으로 우뚝 섰다.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이끌었다.

맺는말

만약 이병철 회장이 조홍제 회장과 동업자로서 신의를 지켰다면 효성그룹이 탄생하지 못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필자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즉, 정암나루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함안 출신 조 회장도 솥 바위 전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함으로써 전설의 3인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이렇듯 ‘솥 바위 전설’은 현실이 되었는데, 효성의 사세가 삼성, LG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음·양택 명당의 역량(力量) 차이이며 자연의 섭리이자, 풍수지리의 이치(理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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