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09:01 (수)
함축과 합일의 미학
함축과 합일의 미학
  • 월간리치
  • 승인 2015.11.11 07:59
  • 호수 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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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 가득히 정애(情愛) 넘치는 관조와 응시가 있었기에 그토록 무수한 헤어짐과 얽힘을 시간의 영속성에 녹였다가 깎고 덧칠하며 순수한 손길로 다듬어 낸다. 최장한 화가이 다루는 사람 사는 이야기는 누구나 쉽게 공감하는 묘법으로 다가온다. 의도하지 않은 진정성이 빚어내는 미학의 세계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 속에서 자각하고 직관의 느낌을 정제하여 단순화하는 과정의 시간들! 자연의 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태어나 결혼하여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고 그 구성이 사회를 만들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인한 정애의 구성체!
최장한 작가가 창조한 작품세계는 그래서 ‘삶- 시간 속의 이야기’로 불린다.  


삶-시간 속 이야기를 刻畵하다

산, 대지, 나무, 숲, 땅과 관계 지어진 인간의 숙명을 ‘삶- 시간 속의 이야기’로 전개해온 최장한은 스스로 경험하고 느껴온 심상의 내적 울림을 직관이라는 공명으로 되돌림 한다.
버질아메리카 강구원 주간의 논평을 옮기면, 생성과 소멸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침잠한 끝에 떠오르는 상을 감각적으로 표출하고 하려는 작가적인 고뇌가 오히려 부조처럼 각인되어 화면을 더더욱 옹골차게 끌어감으로써 시각적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거칠고 부드러운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을 삶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합일시킴으로써 시간의 영속성과 종교성을 포함하는 실로 끝없는 탐구의 의미체를 드러낸다”는 것.
무구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탐험가처럼 올곧게 다가서는 최장한의 작가의식이 새와 나무와 숲으로 화현하고 나면, ‘시계’의 의미와 제한이 의미를 잃으며 시현(示顯)과 소멸을 거듭한다.
최 작가가 구현한 공간에 영원성이 이입되는 과정은 이러하다.


녹여서 빚어내는 또 다른 의미

최장한의 작품을 흔히 각화(刻畵)라고 일컫는다.
“최장한의 각화는 자연의 일면인 떨어진 잎새에도 가득한 삶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통해 존재의 꿈결 같음을 각인하고, 생의 영원성을 노래한다”고 강 주간은  해설해 준다.
그의 작업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이루어진다. 캔버스 위에 우드락이나 점판을 붙이고, 깎거나 녹여서 형상을 만들고 난 후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각종 매제를 이용한 색 입힘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우리네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 절로 과학적인 손질이 이어지도록 끝까지 작동하는 정성과 감(感)의 정교함이 따를 때 최상의 맛을 내는 이치와 닮아 있다.


새로운 실험 넘어선 원숙미 고조

그간에 추구했던 수많은 기법적인 실험의 결과는 원숙한 단계로 넘어서서 갈수록 고양되고 있다.
“종이부조처럼 튀어 오른 표면에 자연스런 색의 스며듦과 자연 외형의 곡선에 반복적인 사각의 도형적 요소, 색종이 오리듯이 사각과 원으로 표현된 나무들은 마티스 말년의 색종이 오려 붙이기 작업을 보듯이 사심 없는 아이들 마음과 닿아 있으며, 전각도로 깎듯이 드러난 볼록과 오목의 선적인 조화는 수많은 세월의 풍상에서 깎여진 암각의 자연미를 체험케 한다.”(강구원 주간)
나무와 꽃과 새가 얽히고 공존하는 숲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다양한 종의 형상을 기호화한 작품에선 세포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또 다른 질서의 자연스러움을 내포한다.
음과 양이 순환하고 조화를 이루는 우주의 운행이 아무리 불가해 하고 오묘해도 최 작가 내적 심연이 끌어 올리고 나면 주제의 무거움이 가벼워져 누구나 쉽게 다가서게 하는 묘법을 즐겨 쓴다.
최장한 작가 스스로 즐겁게 기울인 열정이기에 보는 관객 누구나 그 세계에 쉽게 들어서게 된다. 현대미술의 기법적인 측면을 자기화하지 않고서야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연기사상과 참 나에 이르는 大我

최 작가 작품 속 개체들은 산, 나무, 도자기, 꽃, 사람, 새 등 등,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들이다.
하지만 그 소재들의 반복된 조합은 또 다른 시각의 새로움을 연출한다. 각 존재의 관계 설정과 내면에 흐르는 그만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유적 핵심 근거를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석사학위논문인 <선(禪) 사상을 통한 추상적 표현>을 참조할 만하다.
일차적으로 스스로의 정화(淨化), 우주와 인생의 모든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사상, 그리고 우주 본체로서 참 나에 이르는 대아(大我)를 얻기 위한 그림의 향을 지피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과정과 기법 그리고 그 위에 펼치는 자연의 형상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내적 의식의 집결체이자 표면화된 역사성임과 동시에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거울로 환원되었다고 설명하는 게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초기작품은 인간의 시대적 또는 과거 시간의 현재성을 조명한 것으로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공간에 동일화함으로서 불교의 연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형상의 반복과 집약은 시작과 끝을 하나라는 극히 동양적이며 불교의 윤회사상의 발로로 우리의 자연관과 만나게 된다.


해학에 큰 아픔 담는 전통 연희처럼

그는 스스로 “좀더 인간의 문제를 깊게 추상화하고 싶다”고 했다. 사람들의 삶 속으로 진정 빠져들어 불안한 현실에서 부여잡은 자신의 메시지를 보편화 하고픈 열망이 가득한 셈이다. 보편화한다는 것은 작품을 통해 소통하는 것으로 그 장은 당연히 전시를 통한 대중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최 작가의 예전 그림들은 색상을 거의 배재한 모노톤이 주류를 이뤘고 차츰 색상을 가미하는 쪽으로 전개됐다고 한다. 색을 배제할 때의 작품이 색을 제거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게 강 주간의 평이다.
그렇다고 다양한 색상으로 표현되는 요즈음 작품이 다양성 보다는 화면의 단일성으로 통합되고 통일되어 보이는 점도 화면의 질감과 두께에서 오는 시각적 자극이, 색채로 직관되는 감각적 인식에 앞서는 더 묵직하고 근원적인 시간의 깊이를 담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작가는 “쌀 막걸리가 생각나는 화면의 질감”을 추구한다고 한다. 우리만의 정서와 우리만이 갖는 구수하고 담백한 맛을 숙성된 음식과 음료의 맛처럼, 기다림의 시간을 그 속에 함축하는 세계를 추구한다.
또한 각인된 인간의 모습이 코믹하고 유머러스 한, 다르게 보면 캐릭터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부러 인위적으로 만든 형상이 아니라 감각의 펼침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형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우리네 모습의 극적인 요소가 역으로 발산되어 더 큰 아픔을 드러내는 전통과 놀이의 즐거움이 조합된 최장한 자신이 간직한 의식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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