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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주 붓 작업의 성숙 숲과 빛 마침내 하나 되기
조여주 붓 작업의 성숙 숲과 빛 마침내 하나 되기
  • 월간리치
  • 승인 2014.12.10 10:14
  • 호수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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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붓 터치 작업은 매 손길마다 존재와의 교감을 층층이 쌓아올리는 동시에 침전과 퇴적의 과정이 이어진다. 숱한 반복을 수반하는 그만의 여로이자 구도(求道)의 길에서 자연과 자신이 합일하는 경지에 올랐고 빛과 어둠으로 이원화되던 채색 대신에 온화한 빛을 발산하는 원숙한 작품 세계로 나아갔다. 리치에서는 대모산이 보이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대모산이 정면에 보여 4계절의 신비로운 변화에 진한 영감을 얻는다는 조 작가의 작품세계에 빠져본다.


1984년 첫 개인전 이래 여덟 번째 개인전이 2005년 열렸고 다시 아홉 번째 개인전을 2011년 열었던 조여주 작가. 예술창작의 세계에서 원숙미의 경계란 무한대임을 증명해 준 사례로 보기에 충분해 보인다.
미술사가 김정희 교수(서울대 미대)는 조여주 작가 작품세계를 두고 처음에는 자연이, 1995년부터는 빛이 주제였다고 크게 구분 지어 설명한다. 


자의식 짙었던 때 극단적 대비

조 작가는 첫 개인전 도록의 글에서 “자연은 푸르고 투명한 깊이로 저만치에 앉아 있다”고 쓰면서 “투명하게, 푸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작업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자신의 눈에 비친 자연의 외양과 원리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닮고 싶은 상태를 표현하기 원했던 시기가 이때다.
이 시기 작품에서는 무형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화면이 정형적인 패턴이 옵티컬 아트(Optical Art)식으로 반복된 화면과 나란히 나왔다.
김 교수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질적인 화면을 병치시킨 것은 ‘자연이 만드는 형태’와 ‘인간이 만드는 형태’를 대립적인 것으로 본 그녀가 이 둘을 그녀의 작품 속에서 ‘조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후 화가는 파리 유학길에 올랐고 파리의 숲에서 영감을 받은 뒤로부터 인위적인 패턴은 사라졌다고 한다. 이 시기엔 거의 무의식적이고 빠른 붓 움직임의 흔적인 물감 자국이 중층적으로 덮인 올오버(all-over)적 화면을 펼치며 그 이전 형태의 이분법적인 구분도 사라졌다.


밝음 속의 빛 觀統 또는 寬通

‘빛의 탄생’이라는 작품 제목이 등장한 1995년의 개인전 도록은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지만 밝음 속에서도 빛나는 빛이 있음을 나는 보았다”는 조여주 자신의 글로 시작된다.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화가의 이 시적인 문장은 그녀가 무수한 단계의 백색 물감 자국을 반복하여 덧칠함으로써 화면 위에서 빛이 ‘태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환영(illusion)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화면에서 밝음과 어두움은 색깔의 명도의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한 색은 옆에 그것보다 더 밝은 색이 놓이면 어둠으로 인식된다. 그녀의 화면에서 빛은 백색이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빛은 주변의 색, 즉 먼저 칠해진 색보다 백색을 더 많이 섞은 색이 나중에 칠해짐으로써 표현된다. 이에 따라 ‘밝음 속의 빛’은 마지막에는 순백색의 물감으로 나타났다.
또한 어두운 바탕색이 그녀가 빛을 표현한 밝은 색 붓질로 덧칠이 되지 않거나 적게 된 상태로 남아 있는 곳은 화면에 깊이감이라는 환영을 만들 뿐만 아니라 화면을 나누거나 관객의 시선을 모으게 만들어 화면 안에서 구성적인 요소를 작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1985년의 작품에서 시작되어 ‘자유로운 바람보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1993년의 개인전에서 소개된 작품까지 계속 나타난 화면의 ‘올오버’적 특징이 사라지게 되었다.
‘빛의 탄생’에서 빛은 각진 모서리를 선명히 남긴 짧고 넓은, 그리고 더러는 사각형 형태로 보이는 정형화된 붓질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붓질의 방향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제각기여서 화면 위에 허공에 흩어져 날리는 종이 조각들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구체적인 자연상을 가능한 한 멀리 추방하고 싶다”고 밝혔던 1991년의 작품에서 절정을 이루면서 화가의 신체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의 방향과 속도의 흔적을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던 붓자국을 대체한 이러한 붓질의 ‘규격화’는 1993년의 작품에서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대의 작품에서 마른 물감의 붓질과 중첩된 붓질로 그것의 선명함은 줄어들어 갔지만 여전히 ‘빛’은 크기가 비슷하고 모서리가 각진 붓자국으로 표현되었다.


균질화한 붓질 단색조로 변신

첫 개인전으로부터 사반세기 이상 지난 후 열린 최근 전시에서 조 작가는 숲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단색조의 작품들로 또 한 층 변신을 보여준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회화에서 시기적으로 연이어 나왔던 자연과 빛이라는 두 주제가 결합되었다.
조 작가는 자신의 최근 작업과정에 대해 “숲에서 느끼는 평온함, 햇살에 빛나는 이파리들, 숲의 소리, 생명과 빛이 가득한 곳, 또한 죽음도” 등의 말로 요약했다.
작가는 그 무렵부터 자주 산을 오르거나 숲은 산책한다고 한다. 넓은 스펙트럼의 녹색조, 청색조나 은색조의 색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단색조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색, 크기와 붓의 속도가 균일한 수많은 붓자국은 가까이서 보면 실제로 나뭇잎이나 꽃잎 또는 나무껍질의 모습을 닮아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그것은 나무나 숲을 그리고자 한 행위의 결과라기보다는 화가가 캔버스 바로 앞에서 수많은 붓질을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태어난’ 나무와 수 이미지”라고 풀이했다.
또한 “이 붓질은 화가가 1990년대의 작품에서 보여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다양하고 빠른 붓질대신에 택한 것”이며 “이러한 붓질 반복의 단순성과 균일함은 목탁을 두드리거나 묵주나 염주를 돌리는 행위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평가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목탁 소리 하나하나가, 구슬 하나하나가 하나의 단어가 될 수 있듯이 그녀의 각 붓 자국은 그녀의 존재의 확인이자 물감 자국이자 나뭇잎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 작가가 “살아있어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자신이 “숲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으로도 표현하듯이 그녀에게 이제 자연은, 그녀가 첫 개인전을 열던 때처럼, “저만치” 떨어져 있고 그리고자 하는 대상(object)이 아니다.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화면을 분할하게 될 때 요구되는 구성적 요소가 사라지면서 그녀의 회화에서 올오버적인 화면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고 김 교수는 짚어낸다.


빛과 반짝임 온화한 드러냄

빛 역시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녀가 환영을 만들어 표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녀의 ‘빛의 탄생’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화면에서는 빛이 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범신론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빛을 통해서 자신의 형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반짝임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빛이 있음을 알게도 해준다. 조여주의 화면 안에서 빛은 그러한 이파리들을 닮은 붓자국을 통해서 태어난다. 그녀의 캔버스에서 나무줄기 실루엣처럼 보이기도 하는 어두운 부분은 빛의 상대 개념으로서 어둠이 아니라 그것 역시 빛으로 그 옆의 빛보다 어두운 빛이다. 이러한 화면 안에서 그녀의 두 주제인 자연과 빛이 결합되었다. 이를 통해서 그녀가 숲의 일부로 느끼면서 자연과 자신을 구분하는 이분법이 소거되었듯이 그녀의 화면에서 빛과 어둠을 나누던 이분법도 사라졌다.
사반세기 이상 조 작가 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무수한 붓질의 반복과 그것의 흔적이다. 반복된 붓 자국은 붓질이 즉흥적이든 계산되었든, 또는 낙서와 같은 연필 자국이든 물감 자국이었든, 그리고 식물 모습을 연상시키거나 최근의 작품처럼 나뭇잎 모양을 연상시키든-모두 붓을 통해서 화면에 전달되어 물감을 통해서 남게 된 화가의 신체의 에너지와 심상이 형상화된 것이다.
이제는 화가 자신과 자연을 분리시키던 자연의 대상화나 빛과 어둠의 나눔에서 발견되는 이원론적 구분이 소거되고, 화가의 개성을 현저히 드러내는 거친 붓질이나 강한 색깔이 사라졌으며 온화한 빛을 발산하는 그녀의 최근 회화의 화면은 화가의 심상 그대로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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