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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맥 소재 깊고 우아한 조형공간
잎맥 소재 깊고 우아한 조형공간
  • 월간리치
  • 승인 2015.07.10 15:38
  • 호수 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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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조형언어와 화법으로 일궈낸 개성으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시대. 우리 전통예술의 한 갈래로 면면히 이어온 옻칠에서 현대회화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전인수 작가다. 유채나 아크릴과는 판이한 색감의 깊이와 우아한 멋을 바탕 삼은 잎맥의 형상화와, 신비로운 조형패턴이 예술 심연을 끝없이 확장시킨다. 리치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미술에서 요구되는 창작이란 남과 다른 조형언어 및 어법을 추구하는 일이다. 어쩌면 미답의 조형세계를 강구하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새삼 전통적인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에 연유하는지 모른다.
전인수 작가는 한국의 오랜 전통미술 재료의 하나인 옻칠을 재료로 작업한다. 옻칠은 한국의 오랜 전통미술의 한 재료임에도 현대미술이 그 효용성에 시선을 주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현대미술이 옻칠을 수용하게 된지는 10년 남짓에 불과하다.
신항섭 미술평론가는 “그의 옻칠 작업은 선두그룹에 속하는 셈”이라고 단언한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옻칠회화는 그 태동단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직 일부 작가들이 부분적으로 옻칠이나 그에 따른 나전과 같은 재료를 현대미술에 응용하기 시작하는 정도일때 그는 전면적으로 수용, 새로운 세계를 연 것이다.


고급 전통 재료 가치 되살리기

<옻칠회화>를 앞세우며 전통적인 재료 및 기법을 그대로 따르는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전문가 집단이 출발한지도 역시 10년을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포함하여 옻칠을 이용하는 회화작업에 전념하는 작가들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통공예의 하나로 분류되는, 옻칠을 재료로 하는 일련의 회화작업은 이제 새로운 회화장르의 하나로 각광받는 시기에 이르렀다. 전통공예로서의 옻칠은 주로 전통적인 생활기물, 즉 가구를 비롯하여 나무를 재료로 하는 상자나 그릇은 물론이려니와 소소한 일상적인 생활기물에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러면서도 옻칠을 사용한 기물은 고급스러움의 대명사였다. 적어도 사대부나 재력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고가였기 때문이다.
전인수 작가의 작업을 보면 현대미술에서 무엇 때문에 새삼 옻칠에 관심을 갖는지를 알 수 있다. 옻칠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만든 회화작품은 확실히 기존의 유채나 아크릴 작업과는 판이하게 다른 색감이나 깊이 그리고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유채나 아크릴 작품과 비교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보존성이라는 문제에서도 탁월하다. 즉 재료가 지닌 물성이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최초의 재질이나 색깔이 온전하게 유지된다. 주지하다시피 옻칠은 땅속에서 수천 년을 지나도 썩지 않는 반영구적인 재료이다. 이는 옻칠이 가지고 있는 내구성과 방충 및 방부효과 때문이다.


옻칠 바탕에 도드라지는 채색과 형상

나무판 위에 모시 헝겊을 바른 뒤 그 위에 나전이나 계란, 금, 은, 채색 물감 등을 이용하여 형상을 만든 뒤, 옻칠로 마무리하는 그의 작업은 유채나 아크릴 작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와 우아함을 발산한다. 형상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 및 채색 물감의 처음 그대로의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남으로써 발색의 아름다움이 충만하다. 그는 옻칠이 표현할 수 있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손실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그의 작품 대다수가 검정색 바탕에 형상이 만들어지는 작업 패턴을 가지고 있다. 원래 갈색인 옻칠은 시간이 지나면서 검은색으로 바뀌어 고착된다. 그러기에 형상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검은색 일색이 된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검은색 바탕 위에 형상이 들어앉는 형국이다.


심오 신비 순수한 물성으로 빛나

검은색 바탕 위에 드러나는 형상은 어떤 소재 및 주제이든 명징하게 보인다. 검은색 속에서 떠오르는 형상은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발색을 자랑한다.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떠오르는 한줄기 빛처럼 신비하면서도 총명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빛과 발색은 심오하기만 하다. 재료나 물감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을 해치지 않고, 그 본래적인 물성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옻칠의 효과는 심미안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현혹되지 않을 수 없다.
캔버스 위에 물감이 얹히는 유채나 아크릴과는 전혀 다른 심원한 공간감이 형성된다. 일테면 우주공간과 같은 개념의 심도 깊은 무한성이 감지되는 것이다. 옻칠이 만들어내는 검정색에는 확실히 신비적인 요소가 깃들이고 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을지언정 실재하는 공간으로서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우주와 같은 무한 공간에 형상이 들어섬으로써 그 형상은 우주 속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된다.
검고 빛나는 발색을 가진 옻칠을 재료로 하는 회화는 현실적으로 흔치 않다. 배우는 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전통공예로 인식되고 있어 현대회화로 받아들이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직 미비한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옻칠을 재료로 하는 회화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관대한 분위기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달리 보면 그 어떤 재료든 제한 없이 수용하는 현대미술의 속성상 옻칠은 가장 매력적인 새로운 회화재료일 수 있다. 


선묘 중심 한국화 조형감각 번뜩여

전인수 작가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옻칠회화는 기존의 전통회화는 물론이려니와 서양회화의 유채나 아크릴과는 또 다른 표현력을 지닌 재료임이 분명하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검정색의 신비야말로 옻칠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표현력의 하나이다. 그 검정색 위에 아무런 형상이 들어앉지 않더라도 충분히 깊고 아름다운 공간감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주와 같은 실제적인 공간감이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가 작업의 난이도가 높은 옻칠 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끝 모를 공간감과 발색이 주는 깊이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최근 유행하는 합성옻칠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천연 옻칠을 사용한다. 한국화를 전공했으면서도 오랜 작업시간과 공력을 필요로 하는 옻칠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옻칠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소재의 선택과 그를 표현하는 기법과 관련해 한국화에서 익힌 조형감각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소재의 선택에서도 선묘 중심의 한국화의 조형감각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으리라.
그는 옻칠작업을 시작하면서 무엇을 소재로 할까 고민하다가 나뭇잎의 잎맥을 선택했다. 수종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지는 나뭇잎의 잎맥은 잠자리 날개처럼 섬세하면서도 오묘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영양을 실어 나르는 나무의 잎맥의 패턴을 형상화하여 그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키는데 옻칠기법은 효과적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늘고 섬세한 잎맥이 검정색의 옻칠 속에서 떠오르는 상황은 신비스러움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잎맥 조형패턴의 무궁무진 변주

처음에는 잎맥의 형상 그 신비로운 조형적인 패턴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한국화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물을 보면서 스스로가 놀랄 지경이었다. 그런 경이로움에 이끌려 나뭇잎 잎맥에만 몰입했다. 하지만 몇 작품을 하면서 동어반복적인 조형적인 패턴을 벗어나 다양한 변주를 획책하게 된다. 자기복사의 위험성에서 벗어나면서도 다채로운 조형적인 변주를 통해 자신의 조형감각, 그 잠재적인 능력을 시험해보는 즐거움이 적지 않았기에 그렇다.
처음에는 재현적인 이미지보다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겨냥한 조형적인 해석에 의미를 두었다. 그러다가 극히 섬세한 선으로 잎맥 그 형태적인 사실성을 강조하는 작업에 매료되기도 했다. 금박지 위에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되는 극사실적인 작업은 옻칠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극대화한다. 이렇듯이 잎맥을 소재로 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부터 다채로운 회화적 해석을 덧붙이는 일련의 작업과정을 거치며 옻칠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적인 해석이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요구에 충실했다. 나뭇잎의 잎맥이라는 특정 소재에 천착하는데 따른 이미지의 협소성은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뭇잎의 종류를 확장하고, 잎맥의 형태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등 조형적인 변주를 강구하게 된다. 비실제적으로 잎맥을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가 하면 보다 회화적인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것도 보다 풍부한 조형세계를 경영하기 위한 노력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구성과 관련해 동양의 회화가 지향해온 여백개념을 도입하기도 한다. 서양적인 공간개념과는 다른 여백으로 공간구성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키고자 했다.


온 우주 風變萬化 녹여낸 용광로

그런가 하면 바람과 같은 자연현상을 개입시킴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형적인 해석 및 변주는 소재주의를 극복함은 물론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얻는데 효과적이다. 보이는 것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 또는 공간감의 표현은 미시적인 잎맥의 형태와 거시적인 우주를 동시에 아우르는 조형적인 기교이다. 그의 조형적인 상상은 이처럼 옻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끄집어내는데 집중된다.
이제까지 그가 보여준 작업은 나뭇잎 또는 그 잎맥을 재현하거나 재해석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는 충분히 즐겁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거기에는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을 제한하는 그 어떤 방해물도 없었다. 오로지 조형적인 상상의 공간의 확장을 꾀하는 데 열중해왔다.
그런 그의 앞날과 관련해 신항섭 평론가는 “이후에는 새로운 소재 및 내용을 추구하게 될지 모른다”고 예상했다. “창작의 윤리성에 충실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면 또 다른 소재 및 새로운 조형세계와의 조우가 가능할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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