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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을 통해 본 한국경제 성장 역사 “내 사전에 좌절은 없다”
호암을 통해 본 한국경제 성장 역사 “내 사전에 좌절은 없다”
  • 월간리치
  • 승인 2010.02.27 11:26
  • 호수 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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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삼성그룹은 호암 이병철(1987년 11월19일 타계) 회장을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열였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호암이 태어난 1910년은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던 암울한 해이기도 하다. 암울하던 시기에 태어난 호암은 좌절하지 않고 삼성이란 기업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육성해 국가 경제에 기여한 인물이란 평이다. 는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의 인생과 경영철학에 을 집중 조명했다.

호암은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중교리에서 부유한 양반 집안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당시 배웠던 논어는 그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쳐 기업 경영철학의 밑바탕이 됐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어수선한 시기 속에서 호암은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신식학교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호암의 부모는 호암의 뜻이 확고한 것을 알고 11세의 어린 자식을 진주 지수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시켰다. 이후 호암은 서울로 와 중동중학교 과정을 마친 뒤 1926년 12월 5일 17세의 나이로 사육신의 후손인 박두을 여사와 결혼했다. 호암은 일본유학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공부 중 병을 얻어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건강을 회복한 뒤 호암은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아버지에게 300섬에 달하는 재산을 받아 1936년 2명의 지인과 함께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창업했다.

정미소로 시작한 사업의 길

사업 첫해에 손실을 본 호암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뒤 호암만의 방식으로 정미소를 운영, 흑자로 돌리면서 본격적인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이후 트럭 10대를 보유하고 있던 일본 운수회사를 인수한 뒤 사업을 번창시켰다. 트럭은 다시 20대로 늘어가며 운수업은 탄탄대로의 성공행진을 이어갔다.
이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부동산업에 진출했다가 1937년 중일전쟁 여파로 은행 대출이 중단되면서 커다란 실패를 맛보게 된다.
후일 호암은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 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되었다. 사업은 반드시 시기와 정세에 맞춰야 한다”고 회상했다.
모든 사업을 청산한 호암은 소자본에 맞고 수익성도 높은 무역업에 나서기로 하고 1938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대구 인교동에 ‘삼성상회’란 간판을 걸었다. 삼성의 ‘삼’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의미하며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상회를 설립했을 때부터 호암은 인재를 아끼고 직원들을 믿는 경영철학을 보여줬다. 호암은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고 ‘호암자전’을 통해 경영철학을 피력했다.
1948년 호암은 잘나가던 삼성상회를 청산하고 서울로 진출했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 것. 당시 호암은 ‘사원주주제’를 도입, 회사 수익이 나면 지분에 따라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주는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는 창업 1년 만에 무역업 랭킹 7위란 놀라운 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사업은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대구 양조장을 위탁경영하던 직원들로부터 양조장사업의 수익금을 받아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내려가 삼성을 재건하게 된다.

혁신 앞세운 경영론 성공 발판

호암의 사업정신은 이후부터 꽃을 피게 된다. 당시 무역업을 통해 1년 만에 자본금의 17배를 불린 호암은 중역회의를 소집, ‘제조업 진출’을 발표하게 된다. 그는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온 국민에게 설탕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호암은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함으로써 ‘기술보국’이란 경영철학을 마침내 구현한다. 호암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1980년대에는 기업인으로서 생애를 건 일대 모험을 시도한다. 반도체와 컴퓨터사업에 진출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1976년 위암 진단을 받았으나 불굴의 정신력으로 병마를 이겨내며 그 후로 10여년이나 더 생존했다. 이 기간에 호암은 삼성중공업을 창립하고 거제조선소를 지어 발전시켰으며 삼성석유화학을 만드는 등 끝없는 도전을 했다.
삼성을 비롯해, CJ, 신세계, 한솔 등의 기업들이 창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
 “미래 경영을 위한 인재 양성 필요”

 

이건희 전 회장 등 총수일가 대거 총출동
미래경영, 미래를 담다 추모영상 공개 ‘화제’ 
 
지난달 5일.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소소문 호암아트홀의 열기는 뜨거웠다. 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식을 찾는 이들의 발길 탓이다. 좀저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건희 전 회장을 비롯해 유가족과 지인들 외에 삼성, 신세계, CJ 등 방계 그룹 임직원 및 정관계·학계·재계·문화예술계 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문예지향(文藝之香), 백년일가(百年一家), 미래경영(未來經營) 등 5개 테마로 나눠져 진행됐다.
이 전 회장은 추모식에 앞서 “선친께서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큰 이정표를 남기신 것은 오로지 국민 여러분과 사회 각계의 도움 때문”이라면서 “선친의 유지를 변함없이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박태준 전 국무총리는 축사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살아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해 보니 평소에 인재제일과 미래경영을 강조했던 만큼 인재양성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도전과 창의, 근면과 성실의 인재들을 부단히 길러내는 것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라고 강조했다.
호암 추모식은 영상을 호암이 쌓아 놓은 업적을 단계별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첫 순서인 ‘사업보국, 호암을 만나다’ 는 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 제조업을 통해 국가 발전을 도모했던 고 이병철 회장을 추모하는 오프닝 영상과 함께 이현재 호암재단 이사장의 기념사와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축사가 진행된 후 경영성과와 철학 등을 조명하는 영상이 상영됐다. 
이어 ‘인재제일, 사람을 말하다’ 순서에서는 평소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호암의 철학을 강조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과 손상모 전 삼성종합건설 사장, 야마자키 전 일본경제신문 한국 특파원의 인터뷰 영상과 함께 호암의 생전의 모습과 육성이 방영됐다.
‘문예지향, 향기를 느끼다’ 순서에서는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가야금 연주 ‘침향무’가 진행된 후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을 리노베이션해 2012년, ‘삼성 역사관(가칭)’으로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백년일가, 마음에 새기다’ 순서에서는 유가족 대표로 이건희 전 회장의 감사 인사가 있었다.
끝으로 ‘미래경영, 미래를 담다’ 순서에서는 호암의 ‘무한탐구’ 정신을 강조하는 엔딩 영상이 상영된 후 사회자의 폐회식 선언 끝으로 기념식의 막을 내렸다.


호암 어록으로 본 한국경제사
짧은 말 한마디, 길고 긴 여운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기술은 국력이며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핵심기술과 첨단제품을 우리 스스로 개발해 경쟁력을 높여 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다. (1986. 6. 27.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기술은 돈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기반은 경제이고, 경제를 튼튼히 하기 위한 화급한 문제는 기술혁신이다. 우리들에게는 사람과 그 사람을 교육하는 사회적 기능이라는 자원이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경험과 실적으로 자신이 생겼다. 이제는 자금과 기술이 있으면 된다. (1981. 8. 29. 일본 <다이아몬드>지 인터뷰에서)

기업의 부침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대한 고비가 될 이 시점에서 삼성이 특히 필요로 하는 것은 개척자적 정신의 고취이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을 먼저 키우고 확보하는 것이 정상으로의 지름길인 것이다. 삼성은 인력개발에 남다른 노력을 해왔지만 앞으로 국제적인 시대, 고도 산업시대에는 더 차원 높은 인력이 필요하다. (1981. 1. ‘신년사’<사보 삼성>에서)

자기 한 개인을 위한 기업은 망하고 만다. 인류나 국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이라야만 그 사업이 발전할 수 있고 기업가로서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돈만 벌겠다는 생각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기업가가 지켜야 할 기업윤리일 것이다.(1975. 9. 17.‘최고경영자와의 대화’에서)

국가가 부강해야 국민이 행복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므로 나는 외국의 원조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국부조성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려고 각오한 바이다. 우리나라의 지금 형편으로는 자본금 1억 원 이상의 회사는 대소를 막론하고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공헌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1970. 12. 22. 합동참모대학 강연에서)

기업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금관리 방법이다. 투자된 자금에 대해서 이익배당금을 찾아가기보다는 회사에 유보, 또는 재투자의 방법으로 활용함으로써 항시 회사의 성장발전을 위하여 힘을 기울여야 한다.(1970. 12. 22. 합동참모대학 강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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